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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석 칼럼]태극기를 위하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건국 50주년을 축하하려고 큰길마다 주욱 태극기를 달아 펄럭이도록 둔 지 한달이 돼 간다.

1875년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 군함 운양호 (雲揚號) 와 강화도 초지진 군사들이 교환한 포격 사건 탓에 두 나라 사이에 시비가 일어나기 전까지 나라에는 국기 (國旗) 라는 것이 있다는, 혹은 있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우리나라 사람들은 몰랐다고 한다.

일본은 자기네 군함에 일본 국기가 걸려 있었는데도 우리 쪽이 포격했다며 트집잡았다.

우리나라도 국기를 만들어 가져야겠다는 동기는 이렇게 영광 아닌 모욕 속에서 태어났다.

얄궂게도 태극기는 일장기 (日章旗) 와 닮은 데가 많다.

흰 바탕이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점에서 그렇고 중앙에 원이 있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그 원의 적어도 반은 붉은 색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알파벳 순서로 국기가 입장하거나 게양되는 국제행사에서 재팬과 코리아의 그것은 수많은 깃발들 가운데서 다시 한번 지구상의 실제처럼 바로 이웃이 된다.

만국기 속에서 나란히 옆에 있을 때 태극기와 일장기는 두드러지게 서로 비슷해 보인다.

일장은 양 (陽) 을 상징하는 붉은 원 하나만으로 돼 있다.

이것은 우주가 음양의 조화라는 사실에 대한 편벽된 무식이거나 고의적 반역이라는 비판에서 우리 선인 (先人) 들은 그것을 바로잡아 종합하는 대안 (代案) 으로서 태극을 우리나라 깃발로 채택했을 것이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마자 집집마다 태극기를 금방 내걸 수 있었던 것은 먹으로 일장기의 붉은 원의 반을 검게 칠하고 옆에 괘를 그려넣기만 하면 쉽게 태극기가 됐기 때문이다.

이 때는 일장기가 태극기를 그리는 원단 (原緞) 또는 반제품 (半製品) 역할마저 했다.

한때 국기를 태극기 아닌 다른 것으로 바꾸자는 의론이 분분했다.

일장기와 비슷하다, 음양론은 케케묵은 미신이다, 진취적 기상이 없다, 이런 것이 그 이유였다.

북한의 인공기 (人共旗) 와 비교되기도 했다.

남한 옹호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열등감에서 태극기를 폄하하기도 했다.

북한 동조자들에게는 태극기를 말살하는 것이 곧 통일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몇가지 긍정적 이유 때문에 급속히 사라져 갔다.

외국 여행이 일반화되면서 밖에 나가 태극기를 접할 때 느끼는 온몸 감격은 태극기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 숫자를 그만큼 불어나게 했다.

국제적 경기에서 우리편 응원단이 손에 잡고 흔드는 태극기, 올림픽 같은 데서 메달을 땄기 때문에 높이 올라가는 태극기를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는 것도 태극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 밖에도 아마 10여년 전부터라고 기억되는데, 우주 빅뱅이나 새로운 소립자 (素粒子) 발견 등에 관련된 서양 신문.잡지의 과학기사에 태극 그림이 과학표시 마크로 매우 자주 등장하고 있다.

태극은 이제 미신이기는커녕 세계인의 과학 심벌이 됐다.

중국 문헌들은 태극 그림이 옛날 전설의 임금 복희 (伏羲) 씨로부터 유래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후 감추어진 채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성리학의 중심 사상을 담은 두 책의 저자, 즉 '태극도설' 의 저자인 북송 사람 주자 (周子) 는 물론이고 '태극도설해' 를 저술한 남송 (南宋) 사람 주자 (朱子) 조차 이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태극은 시간과 공간, 혼돈과 질서, 생성과 변화, 작용과 이용, 상징과 수도 (修道) ,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태극 그림의 여러 변용 (變容) 은 티베트 불교의 만다라에서 오늘날엔 흔히 볼 수 있게 됐다.

태극은 중국 철학의 추상적 개념체계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믿고 있는 태극 그림의 연원은 복희씨 아니라 힌두.불교사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기이한 것은 불교의 태극 그림과 유교 경전인 주역의 태극이 같은 음양 이원 (二元) 의 변화와 결합을 나타내고 있음을 발견하고 이 둘을 일치시켰다는 점이다.

1882년 우리는 이 일치를 국기로 삼았다.

슬픈 것은 1910년에 이르는 그 후 18년동안 우리는 나라가 망하는 마지막 과정을 밟았다는 사실이다.

1백년전 망국 직전의 국난 또는 약 50년전 6.25동란에 견주기도 하는 한국 정치.경제의 부패.규제.관료 크로니즘 체제가 지금 당면해 있는 위기, 이것을 외환.금융위기라고 축소해 불러서는 안 된다.

홍수마저 겹쳐 건국 50주년을 기념하고 제2의 건국을 다짐하는 태극기는 시방 맥을 잃고 처져 있다.

이런 난국을 맞은 한국인들에게 태극이 제시하는 실천 메시지는 궁하면 변화하라는 것이다.

태극기를 위해 태극처럼 큰 정치.경제 개혁을 꼼수 떨지 말고 실천하자.

강위석(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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