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조 달러짜리 이혼 비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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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호 30면

마크 커크 공화당 하원의원(일리노이주)은 지난달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미국 고위 관료들과 미팅을 했다(외교관 출신인 커크 의원은 미·중 우호관계 증진을 위해 구성된 ‘100인 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다). 이제까지 미국의 최대 채권국인 중국에 대해 굳건한 신뢰를 가지고 있던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커크 의원은 가이트너에게 큰 걱정거리를 안겨 주었다.

“중국이 미국의 신용카드를 은근히, 그리고 점잖게 취소하고 있다. 특히 빚을 내기 위해 달러를 찍어대는 미국 정부를 우려하고 있다.” 중국이 미 재무부 채권 매입을 급속히 축소, 유동성 공급을 줄임으로써 달러의 신뢰를 의심하고 있다는 커크 의원의 비유적 문제 제기였다.

그리고 불과 한 달 뒤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중국 지도자들은 ‘달러의 위기’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미국에 투자된 중국 자금의 현황에 대한 우려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세계 최대 외환 보유국인 중국은 미 재무부 채권 약 8000억 달러어치를 보유하고 있다. 이제 중국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가 시장에 남아 있는 질문을 푸는 핵심 열쇠가 됐다. 사실 중국이 달러 비중을 축소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문제는 어떻게 그 과정이 전개될지,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그리고 어떤 대비가 필요한지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국과 미국은 역사상 가장 값비싼 이혼비용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두 나라의 경제 규모를 합치면 17조 달러가 넘는다. 중국은 현재 가지고 있는 미국 채권 8000억 달러어치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일본 등 다른 아시아 국가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렇다고 중국 혹은 일본이 당장 엄청난 규모의 달러 매도를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뉴스가 전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하면 그 부메랑은 아시아로 되돌아올 게 뻔해서다.

달러의 지배를 끝내기 위한 글로벌 경제 구조를 새로 짜는 데 무엇이 필수적인가? 1997~98년 아시아 경제위기 후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는 ‘제2의 브레턴우즈 체제’를 마감해야 할 시점이라는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제2의 브레턴우즈 체제는 아시아 국가들이 미 달러에 자국 통화가치를 연동시켜 온 환율제도를 뜻한다). 새로운 기축통화 시스템을 만드는 일종의 ‘플라자 합의’가 필요하다. 그러면 새로운 달러 협정은 과연 누가 할 것인가.

이 과정은 주요 국가 간 상당한 유기적 관계를 요구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이나 G20,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혹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어떤 국제기구를 통해서일 수도 있다. 목표는 정해졌고 기술적인 과제도 논의됐다. 문제는 협상 시간이다. 새로운 기축통화 협상을 전개할 정점의 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여기서 정치는 방해물일 뿐이다. 미국이 기축통화로서 달러를 쓰레기로 만드는 데 동의할 리 없다. 유로나 엔 역시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중국 위안의 전면 등장은 10년은 기다려야 할 듯하다. 아니면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

‘달러의 사망’에 대한 소문은 이제 더 이상 과장이 아니다. 그럼에도 아시아가 겪고 있는 곤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새로운 기축통화를 거론하는 것은 너무 과장된 게 아닌가 싶다. 미국 정부의 신용카드를 차단한다는 것은 아주 간단히 말해 미국 소비자들이 중국산 제품을 사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17조 달러짜리 이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두 경제 대국이 갑작스럽게 분리되는 것은 적절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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