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박이는 싫다, 내 꿈을 집에 담아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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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호 31면

이탈리아에서는 1986년 슬로푸드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패스트푸드인 햄버거 전문점인 맥도날드가 들어오는 것에 반발한 움직임이었다. 이후 다른 삶의 영역으로 ‘느림’을 촉구하는 운동이 번져 나갔다. 슬로 시티, 슬로 트래블에 이어 최근에는 ‘슬로 홈’ 운동까지 등장했다. 이 운동은 캐나다 캘거리대의 교수이자 건축가인 존 브라운이 ‘slow home’이라는 웹 기반의 커뮤니티를 구축하여 공감을 모으면서 시작됐다. 이 운동은 대량으로 공급되는 판박이 집을 거부한다. 대신 개인이 능동적으로 자신에게 맞는 개성 있는 집을 짓는 것을 추구한다. 집을 지을 땅의 고유한 문화적 환경, 공동체적 정서를 존중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슬로 홈 운동

‘슬로우 힐’에서 건축가 문신규씨가 꿈꾸는 삶의 양태는 누구나가 꿈꿔 봄 직한 것들이다. 별을 보며 잠이 든다든지, 천장으로 빛이 떨어지는 다락처럼 아늑한 공간에서 음악을 듣고, 거실의 한편에 땅과 닿은 정원을 만들어 나무를 키우며, 집 안에 발을 담그고 앉을 수 있는 연못이 있는 것과 같은 꿈들이다. 그는 그저 재미 삼아 시작한 일을 마치고자 할 뿐이라며 과한 의미 부여를 경계하고 설명마저 아낀다. 하지만 이 장소는 그가 건축가로서의 삶의 후반부에서 그동안 생각해 왔던 ‘거주하는 방식’과 ‘집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는 장소다. 전문가의 건축이기보다는 누구나 자신의 일상과 그 무대인 공간의 주인으로서 가져 봄 직한 집에 대한 생각을 실천하는 것에 가깝다.

그가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지만, 집 곳곳을 둘러보면 그 생각들은 그렇게 거창하지 않지만 종종 무시되는 기본적인 원칙들이다. 새로 짓는 집이 주변 환경의 부분으로서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제주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와 공법을 적용하고, 태양열 집열판을 처마로 쓰고 정화조를 이중으로 설치해 중수를 이용하는 친환경적 건축도 그가 지키려는 원칙이다. 그가 지으려는 집의 내부는 다양한 변화를 수용할 수 있도록 유연한 공간 구조를 갖는다. 그는 이 집이 얼마에 팔릴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집을 살 때 고려하는 ‘표준’을 무시하고 자신의 원칙에 맞는 집을 짓는다.

이 원칙들은 단순하지만 구태의연하지 않다. 건축가가 스케치 속에서 추상적으로 생각한 것을 옮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고 공간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대한 그의 고민이 그대로 집에 녹아드는 것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또 살면서 느릿느릿 거듭하는 수정 과정은 집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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