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의 그린수기]23.레드베터와의 만남은 행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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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관우가 명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적토마와 청룡 언월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삼성과의 만남으로 적토마를 얻었다면 데이비드 레드베터와의 만남은 청룡 언월도를 얻은 셈이다.

내가 레드베터와 처음 만난 것은 96년 11월이었다. 나와 삼성 관계자는 레드베터의 골프아카데미가 있는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로 날아갔다.

레슨계약을 맺기에 앞서 테스트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는 "직접 테스트해 본 뒤 레슨을 해줄지 여부를 결정하겠다" 고 말했다.

나의 첫 코치인 아버지는 자존심이 상한 눈치였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으셨다. 그도 그럴 것이 레드베터는 닉 팔도나 닉 프라이스, '백상어' 그레그 노먼과 어니 엘스 등 세계적인 골퍼들을 지도하고 있는 골프코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골프아카데미도 운영하면서 미국.유럽 등지의 16개 유명 골프장과 계약을 맺고 순회교습까지 펼치고 있다.

얼마나 잘 가르치면 세계적인 선수들이 고작 1시간 정도 레슨을 받고 2만~3만달러를 지불할까. 아버지에게서만 레슨을 받아 본 나로서는 무척 긴장됐다.

내 스윙폼을 만든 아버지는 더욱 그랬다. 골프박사로 자처할 만큼 나름대로 스윙 이론에 자신있었던 아버지였으니까. 나중에 알게 됐지만 레드베터는 레슨을 원하는 선수들이 하도 많아 일일이 테스트한 뒤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선수만 가르친다.

그 역시 프로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다. 레드베터는 첫 인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테스트에 들어갔다. 곧장 드라이빙 레인지로 가서 드라이브샷과 아이언샷을 쳐보라고 했다.

나는 "멋진 샷을 보여줘야지" 하고 생각했으나 공은 형편없이 날아갔다.

레드베터가 다시 해보라는 사인을 했다. 다시 공을 쳤다. 역시 만족스런 샷이 나오지 않았다.

공을 서너개 더 쳤을때 레드베터는 "헤드 커버를 겨드랑이에 끼고 다시 쳐보라" 고 주문했다. 처음에는 스윙이 좀 어색했으나 차츰 공이 잘 나갔다.

아이언샷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있게 골프채를 휘둘렀지만 이상하게 샷이 시원치 않았다.

샷을 한참 지켜보던 레드베터가 이번에는 허벅지에 농구공만한 공을 끼고 치도록 했다.

처음에는 공을 맞히기조차 힘들었다. 허벅지에 낀 공도 자꾸 떨어졌다.

스윙이 뜻대로 안돼 자존심도 상한데다 "참 별것을 다 시키는구나" 싶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그런 우스꽝스런 자세에 점점 적응이 됐다.

등에서는 식은 땀이 흘렀지만 "레드베터가 괜히 유명한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에 대한 신뢰감이 생겼다.

이튿날에는 체력 테스트를 받았다. 20분동안 러닝머신 위에서 빠르게 걷기를 했다. 다음은 웨이트 트레이닝. 레드베터는 계속 주의깊게 관찰하며 내 체력을 측정했다. 마지막날에는 실전 테스트. 단 둘이서만 라운드했다.

우리는 아무 말없이 골프만 쳤다. 그동안 필드에 서면 늘 마음이 편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라운드에 부담을 느꼈다. 테스트가 모두 끝났다.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테스트 결과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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