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독서고수] 정근표의 『구멍가게』를 읽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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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쇼핑카트를 끌고 들어서면 없는 것 없이 다 있는 곳이 바로 대형 할인 마트입니다. 우리 동네만 하더라도 길 건너에 최근 두 개의 큰 슈퍼가 들어섰습니다. 그 바람에 기존에 있던 구멍가게 두 곳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렸지요. 당장에 불친절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한 구멍가게 주인의 고개가 예전과는 사뭇 다르게 밑으로 많이 내려갔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구멍가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은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그만 구멍가게를 차리곤 늘 그렇게 지지고 볶으면서도 오남매와 먹고살고자 아침 일찍부터 참 열심히 삽니다. 당시의 구멍가게는 동네에 한 두 개뿐인 어떤 독점상권이었기에 그나마 열심히만 하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지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어렵던 그 시절엔 구멍가게에 들어오던 돈도, 없이 사는 티를 내려는지 해지고 떨어진 것이 참 많았지요. 밤늦게 가게 문을 닫고 난 다음에 오남매는 엄마의 국방색 앞치마에서 쏟아져 나오는 지폐를 살펴 밥풀 따위로 돈을 수선하곤 했습니다. 때론 다리미로 돈을 다려야했고요. 어머니가 늘상 죄인의 형틀처럼 허리에 차고 있던 앞치마 속은 주머니가 여러 겹으로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쪽에는 고액권을, 바깥쪽에는 잔돈이나 동전을 넣을 수 있었지요.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걸리는 외출 기회에 어머니는 그 흔한 루즈(입술에 바르는 립스틱)조차 없어 아버지에게 통사정을 했습니다. 완고한 아버지는 그깟 루즈쯤은 안 바르고 가도 된다며 자못 가부장적인 기질을 발휘합니다. 나중엔 “나라는 년은 평생 이렇게만 살다 죽으란 팔자란 말요?”라는 어머니의 대성통곡에 그예 굴복하곤 했지만 말입니다.

이 밖에도 형이나 언니가 입던 옷과 교과서까지도 물려받아야 하는 동생들의 ‘숙명’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대목도 나옵니다. 또한 큰맘을 먹어야만 갈 수 있었던 대중탕이었기에 목욕 뒤엔 반드시 어머니의 예리한 ‘검사’를 받아야 했던 기억과 지금처럼 밥통이 없었기 때문에 밥공기의 뚜껑을 꼭 닫아 아랫목의 이불 속에 꼭꼭 감싸놓아야만 했던 그 시절의 안스러운 추억까지 기억의 우물물에서 덩달아 길어 올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갈 수 없는 그 시절, 하지만 그 때는 동네 사람들의 복덕방과 사랑방 구실도 했던 구멍가게가 우리의 추억에 그리움의 환한 불을 지핍니다.

홍경석(50·자영업·대전시 동구 성남동)

◆이 달의 서평 주제는 ‘휴가지에서 읽을 만한 책’입니다. 독서캠페인 ‘Yes! Book’의 전용사이트(joins.yes24.com)에 독후감을 올려주세요. 채택된 분에게는 20만원 상당의 도서상품권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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