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집단입국 시대]上. 달라진 탈북 유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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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국에 거주하는 탈북자 수백명이 한꺼번에 입국하면서 '탈북자 대량 입국'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고 있다. 대량 입국 사태는 일회성으로 그칠 것 같지 않다. 2002년 이후 해마다 1000명 이상의 탈북자가 쏟아져 들어온다. 중국과 동남아 지역에는 5만~10만명으로 추정되는 탈북자들이 떠돌고 있다. 우리는 탈북자들의 대량 입국에 얼마나 대비하고 있나. 이를 점검하기 위해 탈북자들의 현주소와 정부의 탈북자 정책을 3회에 걸쳐 진단해 본다.

편집자

1년 전 친척의 도움을 받아 서울에 온 탈북자 L씨(남.30대 후반)는 요즘 밤잠을 설치고 있다. 얼마 전 중국 옌지(延吉)에서 아내와 두 아이가 탈북했다는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러 기관과 단체를 찾아다니며 상의했지만 합법적으로 가족을 데려올 묘안을 찾지 못했다. 자신이 직접 옌지로 가 가족을 데리고 올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2000만원이 넘게 드는 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지난해 입국한 K씨(남.30대 후반)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그는 북의 가족과 연락해 탈북시켰다. 지난달 중국에서 직접 만나 동남아의 한 나라로 탈출시킨 뒤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이번 '대량 입국자' 가운데 가족이 포함되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최근 먼저 탈북한 가족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북에 남아 있는 가족을 데려오는 '기획 탈북'이 늘면서 나타난 사례들이다. 탈북 입국자가 한해 1000명을 넘으면서 과거와 달리 탈북 유형과 동기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셈이다.

?개인에서 가족단위로=2001년 탈북 입국자 583명 가운데 가족동반 입국자는 329명으로 절반을 넘었다. 2002년 가족단위 입국자 비율도 1140명 중 446명으로 40%에 육박했다. 과거 단독 또는 소수가 '의거 귀순'하거나 '망명'하는 것과 크게 달라진 현상이다. 이미 국내 정착 탈북자들이 자신의 가족들을 입국시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다.

2001년 입국한 C씨(34.여)는 "2년 전에 오신 어머니가 북으로 서신을 보내왔고, 탈북한 이후에도 여러 차례 연락을 주고받았다"며 "탈북 목적 자체가 한국으로 오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탈북자들의 '이산가족' 입국 노력은 중국과 동남아국가 등에 체류하고 있는 가족뿐만 아니라 북한 내에 있는 가족들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다. 성공 가능성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북한 당국의 내부통제가 약화된 것도 크게 기여했다. 남북교류와 중국을 통해 남한 정보가 유입되고, 식량문제를 해결하려는 북한 주민들의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가족 단위의 탈북이 쉬워진 것이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의 K씨(28.여)는 "친척 중에 남쪽 방송을 듣는 분이 있어 북에 있을 때도 가족끼리 남한 이야기를 많이 한 것이 가족이 함께 탈북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고 말했다.

?'생계형'에서 '사회혐오형'으로=1990년대 후반 계속된 자연재해와 식량난으로 '탈북 러시'가 발생했을 때만 해도 대부분 탈북자들은 배가 고파 국경을 넘었다. 대부분 중국에서 친척을 만나 돈이나 식량을 구하면 북한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최근에는 더 나은 삶을 위해 탈북하는 경우가 늘었다. 지난해 말 통일연구원이 탈북자 51명을 심층면접한 결과 돈을 벌어 보려는 생각으로 탈북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또 북한 사회의 최하층보다는 오히려 중상류층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남대 북한대학원 이우영 교수는 "최근 탈북자 중에는 절박한 생존의 문제가 아닌 더 나은 생활환경을 찾아나선 '자발적 이주민'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탈북자들의 해외체류기간이 늘어나고 어린이와 여성 탈북자가 급속도로 증가한 것도 달라진 모습이다. 지난해 상반기에 입국한 탈북자 503명의 개인당 평균 해외체류기간은 3년11개월로 2002년 평균보다 9개월 늘었다. 90년 이전 여성 탈북자는 10% 미만이었으나 2001년 이후에는 50%를 넘어섰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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