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17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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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퉁명스런 것 외에는 감정의 기복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여편네의 천편일률적인 암기식 (暗記式) 대답이 수상쩍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였다.

윤씨는 애저녁에 서울을 몰래 다녀왔거나 아니면, 아예 가지도 않았으면서 여편네를 사주하여 행중을 따돌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언제 누가 전화를 걸어도 다식판에서 찍어내듯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여편네의 미욱스런 태도에서 그런 심증이 굳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위인이 숨어 있기로 작정한 것이라면, 당장은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소득도 없을 윤종갑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것보다 더 다급한 것은 오징어 거래선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그 거래선을 찾는 일까지도 도매상이나 영세한 어민들과 안면이 많다는 윤종갑에게 일임해두었던 것인데, 위인의 행방이 묘연한 지금은 막연할 뿐이었다.

그들이 수소문하고 있는 오징어는 반건조된 것이었다.

요사이 한창 유행하고 있는 맥반석 버터구이의 원자재라 할 수 있는 반건조 오징어가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성층과 어린이들이 즐겨 찾는 맥반석 버터구이는 휴가철로 접어들면서 수요가 급증했고 그와 함께 품귀현상까지 빚고 있었지만 생산자와 행상인들 사이에 원활한 유통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었다.

반건조를 하고 있는 어민들도 수효나 규모면에서 매우 영세한데다가 수집상들도 토박이들에게 한정되어 있어 부르는 게 값이었다.

수요가 가장 많은 해수욕장 주변의 노점상들은 거개가 휴가철의 반짝경기를 노리고 몰려든 외지의 어중이떠중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더욱이나 반짝 경기를 겨냥하고 포장마차를 마련하고 나선 실직자들과 용돈이나 벌어보겠다고 나선 학생들은, 유통망을 꿰뚫고 있는 토박이 수집상이나 도매꾼들에게 턱없이 비싼 가격을 치르고 원자재를 사들여 박한 이문으로 행상을 꾸려가는 편이었다.

강원도 영동해안에는 얼추 마흔이 넘는 해수욕장이 산재해 있었다. 고성지역만 하더라도 뒷장.반암.가진.공현진.아야진.봉포.백도.화진포.송지호.삼포.정암.설악.속초.낙산 해수욕장이 있었고, 양양지역에는 오산.수산.동호.하조대.지경.38선.동산.죽도.광진리.남애 해수욕장이 있었다.

강릉 주변에도 사천.송정.등면.경포대.주문진.연곡.안인.정동진.기곡 해수욕장이 자리 잡았고, 동해시 주변에는 어달.옥계.망상.노봉 해수욕장, 그리고 삼척 주변에도 궁촌.장호.용화.호산.삼척.월천.맹방 같은 유수의 해수욕장들이 해안선을 따라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은 해수욕장뿐만 아니었다. 내설악의 창암.백담.십이선녀탕.김부자터골.제추골.건봉사.도원리계곡을 비롯해서 남설악의 공수전.용소골.미천골.주전골계곡이 있는가 하면, 외설악의 진전계곡, 남설악의 황골계곡, 춘천의 부용계곡, 평창의 흥정계곡.금당계곡, 영월의 염둔천계곡, 철원의 순담계곡, 홍천의 명개리계곡과 수타계곡, 동해의 무릉계곡도 여름이 되면 몰려드는 피서객들로 붐비는 소문난 피서지들이었다.

물론 이들 피서객은 옛날과는 판이해서 모두 먹거리들을 집에서 장만해오는 절약형 피서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행상들이 팔고 있는 먹거리들이 팔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집을 나선 사람들은 집에서는 금기시해서 감시받다시피 했었던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이나, 조리 방법이 유별난 군것질에 유혹을 받게 마련이었다.

버터를 곁들인 오징어 맥반석구이도 일상의 긴장감으로부터 해방된 젊은 피서객들이 길가에 서서 먹을 수 있는 먹거리로서는 순대류나 떡볶이와 같이 간식 상품으로서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언뜻 보면, 이문이 박할 것 같지만 이들 피서지에 흩어져 있는 뜨내기 행상들이나 피서철만을 겨냥해서 맥반석구이 시설을 마련한 행상들을 찾아내어 단골로 거래를 튼다면 상당한 이문을 노릴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이문을 노리자면 밤잠 설치는 것쯤은 예사로 아는 부지런을 떨어야 할 것은 이미 각오한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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