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미·러, 핵 군축 모범 … ‘불량한’ 북한 압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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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러시아의 40대 젊은 대통령들이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1) 후속 협정 초안을 담은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양국 관계를 다시 정상화하는 방향으로 재설정(reset)하고, 이란·북한의 핵 개발로 위기에 처한 핵 비확산체제를 구원하고 강화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이번 정상 회담의 가장 큰 성과는 전략무기 감축에 합의한 것이다. 과거 냉전시대 때는 미국과 소련이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들을 동서진영으로 양분해 정치·경제·군사·문화 등 거의 전 분야에서 대립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한 후 계승한 러시아가 미국과 계속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분야는 전략 핵무기에 국한됐다. 그렇지만 이 분야에서 양국이 정면 충돌하는 것은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에 세계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지구상 핵무기의 90% 이상을 갖고 있는 양국이 자발적으로 핵 탄두 수를 추가 감축하기로 합의한 것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미 행정부는 그동안 핵확산금지조약(NPT) 비회원국인 이스라엘·인도·파키스탄에 대해선 사실상 핵 보유를 묵인하고, 러시아와의 탄도탄요격미사일(ABM)제한협정을 일방적으로 폐기했다. 또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에 대해선 비준을 거부해 와 핵 비확산체제 구축에 역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특히 NPT 조약은 비핵국이 핵을 개발하거나 획득하지 않겠다고 약속(수평적 비확산)하는 대가로 핵 보유국은 핵무기 경쟁을 조속히 중지하고 완전한 핵 폐기 조약 협상을 성실하게 추진할 것(수직적 비확산)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이런 부문에서 별로 성의를 보여 오지 않았다는 것이 비핵국들의 불만이었다. 국제정치는 명분 없는 힘만으로는 운영이 힘겹지만 명분이 따라줄 때는 효율적으로 운용된다. 이런 점에서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미국이 자신의 책무를 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미국의 지도력이 강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이번 합의로 미국도 핵 군축에 모범을 보임으로써 비확산체제 강화를 추진할 명분을 어느 정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는 국제사회가 한목소리로 규탄하고 있는데도 계속적으로 핵 보유국 지위 획득을 추진하고 있는 북한에도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다. 특히 러시아가 비록 북한과 우방이지만, 북한의 핵 보유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는 점을 점점 더 확실하게 밝히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중국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 조 바이든 미 부통령이 “북한을 고립시키기 위해 북한에 중요한 나라들을 결집하는 데 성공해 왔다”고 말한 대목이 실감난다. 국제 핵비확산체제를 주도하는 양두마차인 미국과 러시아가 핵 확산을 막기 위해 힘을 합친 것은 북한에 강력한 억지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홍현익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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