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미·러 합의, ‘핵 없는 세상’ 첫걸음 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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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전 세계 핵무기의 95%를 나눠 갖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가 핵무기 추가 감축을 위한 큰 틀에 합의했다. 그제 모스크바에서 만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올해 말 실효(失效)되는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1)을 대체할 후속 협정의 초안이 담긴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양국이 각기 보유한 전략 핵탄두 수를 새 협정 발효 후 7년 내에 1500~1675개로 줄이고, 핵탄두 운반용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수도 500~1100기로 감축하는 것이 초안의 골자다.

현재 미국과 러시아는 각각 약 2200개와 2800개의 전략 핵탄두와 약 1190기와 810기의 각종 핵탄두 운반 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새 협정이 약속대로 이행될 경우 2016년 말까지 두 나라의 전략 핵탄두 보유고는 지금의 최대 5분의 3으로, ICBM도 최대 절반까지 대폭 줄어들게 될 전망이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양국 간 전략핵 상호 감축사에 획을 긋는 역사적 합의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최종 협정문 서명까지 남은 걸림돌이 없지 않다. 미·러 간 최대 현안인 미국 미사일 방어(MD) 시스템의 동유럽 배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이 문제에 관한 재검토를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계획 자체를 철회하지 않는 한 해결이 어려워 보인다. MD 시스템의 폴란드와 체코 배치 문제가 새 핵 감축 협정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있듯이 세부적인 상호 검증 절차가 막판 변수가 될 소지도 있다. 이런 장애를 극복함으로써 양국 정상이 보여준 핵 감축 의지가 연내에 구체적 결실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핵 없는 세상’은 오바마 대통령이 4월 프라하 연설에서 공개적으로 천명한 이상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역사적인 핵 감축에 합의함으로써 ‘핵 없는 세상’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인류가 추구해야 할 실천적 목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궁극적인 핵 폐기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규정된 5개 핵 보유국(미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의 의무다. 미·러 정상은 NPT가 요구하는 의무 이행에 한 발 다가섬으로써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도 NPT상의 의무 이행을 요구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했다. 이번 합의가 ‘핵 없는 세상’을 향한 의미 있는 첫걸음이 돼야 하고, 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다.

당장 내년에 NPT 검토회의가 열린다. 미·러가 최종 협정문 서명에 성공할 경우 당연히 NPT 회원국은 물론이고, NPT 체제 밖에서 핵 개발을 추진하거나 해온 나라들에 대한 압력이 훨씬 거세질 전망이다. 이미 이번 회담에서 미·러 정상은 북한과 이란에 대해 국제사회의 비핵화 요구를 수용하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북한은 미·러의 역사적인 핵 감축 합의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비핵화와 비확산은 21세기 국제사회의 규범이고, 도덕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