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국회는 喪中에 계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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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회의원들이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가슴에는 검은 리본까지 달고 여의도 의사당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누구 초상났습니까?" "국회께서 돌아가셨습니다. " "아니 오십 밖에 안되신 분이 어쩌다…. " "두 달 가까이 식물국회로 계시다 끝내 혼수상태에서 못 깨어 나신 것 같은데 의사 말이 가사 (假死) 상태에 드셨답니다.

여기서 눈을 못 뜨면 진사 (眞死)가 된다는 군요. "

"아 그러면 병명은 먹고 노는 식물 (食物) 국회가 아니라 뇌사상태에 빠진 식물 (植物) 국회였군요. " 삭막한 정쟁 속에서도 '근조 (謹弔) 제헌절 의식' 을 치른 국회의원들의 풍자감각은 얼마나 기발한가.

그렇지만 국회의 사망을 설명하는 용어가 하도 황당하니까 묻는 말이나 답변도 요령부득이다.

"고인께서 손수 돌아가셨습니까. " "물론 손수 돌아가셨죠. 그렇지만 정치가 사망하니까 덩달아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망 원인은 아무래도 간접적이겠죠. " 다른 한쪽에서 제헌절 50주년 기념식을 치르는 분들은 상복을 안 입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까 대답이 시큰둥하다.

"상복을 입은 사람들은 집안 회갑잔치에 부의금 봉투내고 곡을 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 도대체 무슨 곡절이 있는지 비상복파와 상복 (喪服) 파를 상대로 질문을 던졌다.

"정치가 사망하고 덩달아 국회까지 돌아가신 게 누구 탓입니까. " "내탓은 아니고 네탓인 것 같습니다.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개혁 입법들이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도 동고향당 사람들은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분명히 네탓입니다.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안 한다고 해놓고 서고향당 사람들은 우리 당 사람을 야금야금 빼내가고 있습니다. "

"국회의장은 동고향당 (서고향당)에서 나와야 되고, 총리 서리 꼭지가 떨어지지 않는 책임은 서고향당 (동고향당)에 있습니다. " 벌써 몇 달째 이런 좀스런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 있을까. 혹시 정치인과 대중의 역할이 뒤바뀐 것은 아닐까.

대중은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정치문화를 추구하는데 정작 정치인들은 분열주의와 구태 (舊態)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원인을 설명하죠. 독일 철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대립이야말로 궁극적인 역사의 추진력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서로 조화롭게 결합되기도 하지만 타인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는 모순된 존재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역사는 대립적인 주장과 비극적 분규의 연속 아니겠습니까. " 정치를 혼수상태에 빠뜨리고 국회를 사망케 한 소모적 갈등의 배경에 마치 발전적 동기라도 내재하고 있는양 이처럼 그럴듯한 말로 호도 (糊塗) 한다면 차라리 애교라도 있다.

그러나 이런 변명조차 못하는 원시적 갈등은 사람들의 식상 (食傷) 을 산지 오래다. 올들어 치러진 세번의 선거 - 4.2보선, 6.4지방선거, 7.21 재.보선에서 투표율은 기록적인 하향세를 보였다.

드디어 이번 보선에서는 평균 40%까지 (어떤 지역은 26%) 내려갔다.

아무리 정당과 언론이 이번 선거가 중간평가의 의미가 있다느니, 정계 개편의 분수령이니 하고 떠들어 봤자 사람들은 투표장에 나가기 싫은 것이다.

이제 도토리 키재기식 힘 겨루기를 보여줄 선거도 끝났으니 정치도 국회도 가사상태에서 깨어나야 할텐데….

이 답답한 상복을 얼마나 더 입어야 할까. "뭔가 돌파구를 열 움직임이 있으니까 며칠 후면 벗겠죠. " "허송한 세월을 보상할 때까지는 벗었다고 할 수 없지요. " 그만들 둡시다.

이러다 무인사화 (戊寅士禍) 나겠다.

김성호(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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