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5억넘는 현금부자 '적어도 10만명'추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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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D증권사 영업장에 김정민 (52.가명) 씨가 나타났다. 그는 이날 5천만원 가량의 채권이자를 007가방에 현찰로 챙겨 유유히 사라졌다.

지난 3월말에 이어 올들어 두번째. 나라가 부도위기에 몰렸던 지난해 말에 10억원어치를 사둔 대우자동차 채권이자를 챙겨가고 있는 것. 석달에 한번씩 내주는 채권이자 (표면금리 연 25%) 를 매번 6천2백50만원씩 받는데, 그때마다 1천3백75만원씩 세금 (세율 22%) 을 떼고도 반년만에 모두 1억원 가량의 알토란같은 이자를 챙겼다.

서울 강남지역에서 빌딩임대업을 하고 있는 그는 채권 외에도 예금과 주식으로 50억원대의 금융자산을 굴리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가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실직과 감봉, 부채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반면 IMF시대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특히 지난해 11월말 이후 지속되고 있는 고금리시대를 한껏 즐기고 있는 현금부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정부는 이러한 현금부자들의 숫자가 적어도 4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국세청 관계자는 "지난해 이자.배당 등 금융소득이 4천만원을 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지난 5월 한달간 신고를 받은 결과 종합과세 대상자는 4만명을 다소 웃돌 전망" 이라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2만9천명이 종합과세 대상자였다.

그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 금리수준이 갑자기 높아진 데다 사업을 정리하거나 퇴직금을 넣어두고 이자소득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바람에 종합과세 대상자가 늘어났다" 고 말했다.

그러나 돈 많은 현금부자들이 애용해온 종금사 고객분포를 살펴보면 종합과세 대상이 될만큼 금융자산이 많은 사람들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지가 14개 폐쇄종금사들이 개인고객들에게 내준 예금실태를 조사한 결과 종합과세 대상으로 분류되는 5억원 이상 예금자들의 비중이 전체 고객의 0.86%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계 관계자는 "이런 비율을 우리나라 20세 이상 성인인구 (3천1백70만명) 로 확대하고 가.차명계좌와 지하자금의 존재를 감안할 때 적어도 10만명 이상이 5억원 이상 금융자산을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 추정했다.

정치인이나 장.차관 등 '고관대작' 들 가운데 역시 부자들이 많다는 분석도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經實聯) 이 지난해 2월에 재산을 공개한 2백80명의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지난해 연간 이자소득이 4천만원 이상인 종합과세 대상자는 71명 (25.4%) 으로, 의원 4명중 한명꼴로 나타났다.

거액 예금주들을 전담 관리하는 시중은행 VIP센터 관계자는 "5억원 정도의 예금주들은 최근 명예퇴직한 대기업이나 금융기관 간부들을 비롯해 교수.의사 등이 주류를 이룬다" 고 말했다.

예금규모가 10억원을 넘으면 개인사업자나 빌딩임대업자.병원장 등이 대종을 이루며, 30억~50억원대 예금자는 어떤 형태로든 사채 (私債) 와 연결된 자금일 것" 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단계에서는 전주 (錢主) 나 자금의 성격을 밝히기 어려운 은밀한 자금들이라는 것. 권력을 이용해 축재한 전직 고위관리나 정치인들의 재산도 있으며, 중견그룹 이상의 대기업 오너들의 개인재산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앙일보 기획취재팀 손병수.홍승일.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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