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부자]어떤 사람들인가…대물림 땅부자가 대부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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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고금리 소득자들은 국제통화기금 (IMF) 시대의 수혜자로 불린다.

이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며, 어떻게 돈을 굴리고 있을까.

◇ 실태 = 서울청담동에 사는 사채 (私債).임대 사업자 이재혁 (48.가명) 씨. 부동산 갑부였던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을 불려 서울강남구 소재 시가 4백억원대 사무용 빌딩과 2백억원 가량의 금융자산을 굴리는 큰손이다.

회사채 수익률이 연 30%를 오르내리던 지난해말 이후 50억원 가량을 우량기업 회사채에 투자해 짭짤한 재미를 봤다.

사채는 부도가 워낙 늘어나 전보다 운영규모를 줄였지만 급전이 필요한 기업중 안전한 곳을 가려 5천만~5억원씩 월 4부 (연 48%) 로 꿔주고 있다.

오전에 잠시 개인 사무실과 증권사 등 금융기관들에 들렀다 형편이 비슷한 친구들과 시간만 맞으면 평일에도 골프장으로 직행한다.

큰딸은 2년전 미국 대학에 유학을 보내 놓았다.

"언제든 현금 1백억원은 동원할 수 있다" 고 큰소리를 치고 다니는 정수영 (62.가명) 씨도 한해에 3백일 정도 필드를 찾는 골프광이다.

주말엔 북한강.남한강을 넘나들며 요트와 수상스키를 즐긴다.

81년부터 경영해 온 자본금 10억원 규모의 피혁회사는 지난해 막대한 환차손을 봐 어려움이 크지만 金사장의 생활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이들의 공통점은 최근 부동산가치 폭락으로 본 손실을 사채나 채권투자 등에서 얻은 막대한 금융소득으로 보전하면서 변함없는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것.

최근 서울 강남의 호화 룸살롱마다 술잔을 부딪치며 "이대로" (우리는 이대로 IMF시대를 즐기고 싶다는 뜻) 를 합창하는 철없는 부자들의 술판이 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수도권의 한 골프장 관계자는 "주중에 오는 골퍼들 가운데 재산규모가 엇비슷한 사람들끼리 '5백억원 클럽' 이니 '1백억원 팀' 이니 하는 모임이 암암리에 구성되기도 한다" 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 재산형성 과정 = 본지 취재팀이 사례확인에 나선 수십명의 현금부자 가운데 대종은 역시 부동산 부자들이었다.

절반 이상이 70년대 서울 강남, 80년대 신도시 개발붐을 타고 횡재한 뭉칫돈을 사채나 빌딩 임대업을 통해 확대 재생산해 2세들에게 대물림해준 경우였다.

이밖에 ^옛 정권 고위관리나 정치인들이 권력을 동원해 축재한 경우^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의 돈을 빼내 막대한 개인재산을 축적한 기업주 등이 주류를 이룬 것으로 파악됐다.

실제로 최근 사채 중개인으로부터 1백억원을 연리 6%에 5년간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던 李모 (44) 씨는 "이 돈의 전주가 전직 고위관리였다는 귀띔을 받았다" 고 말했다.

◇ 돈 어떻게 굴리나 = 매출 1백억원대의 중소제조업체를 경영하는 金모 (46) 씨는 서울대치동 5층 빌딩과 고향 인근 땅을 합쳐 시가 50억원대의 부동산과 50억원대의 금융자산을 갖고 있다.

현금자산은 석달을 넘기지 않는 단기 금융상품과 채권형 장기상품에 15억원씩을 투자하고, 삼성전자 등 우량주 위주로 20억원대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현금 자산은 최근까지 안정성과 수익성을 두루 갖춘 채권에 투자하자는 것이 단연 인기. 한누리투자증권 강명주 (姜明周) 마케팅팀장은 "수십억원대 이상의 거액 재산가는 금리가 많이 떨어지면서 안전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수익률이 좋은 우량 대기업 발행 채권이나 산업금융채권.국공채, 또는 3대 투자신탁회사 공사채형 펀드에 보유 현금의 상당 부분을 묻어두는 경우가 많아졌다" 고 말했다.

◇ 세금은 제대로 내나 = 이들 고액 소득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뭐니뭐니 해도 세무서다.

서울명동 일대에 7곳의 업무용 빌딩을 갖고 있는 사채 전주 辛모 (72) 씨는 예금 및 어음 3백79억원 상당을 비롯해 모두 6백15억원의 재산가.

하지만 그가 낸 세금은 임대수입 등에 대한 소득세 등으로 95년 4천4백만원, 96년 1억2천3백만원에 불과했다.

그는 94년부터 거둬들인 사채이자 수입 1백27억원을 고스란히 숨겼다가 세무당국에 적발돼 최근 세금 67억원을 추징당했다.

기업부도가 잇따르면서 업주가 회사 돈을 교묘히 빼돌려 개인용도로 쓰는 경우도 빈발하고 있다.

고려통상.라인음향 등 일부 기업에서는 사주가 기업자금을 빼돌려 쓰다 최근 거액의 세금을 추징당해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산다" 는 속설을 입증했다.

◇ 건실한 부자는 구분해야 = '자린고비' 소리를 들어가며 알뜰하게 살아가는 재산가도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

서울중화동에 사는 李모 (75) 씨는 1주일에 두차례 허름한 점퍼 차림에 경로우대증을 들고 지하철을 탄다.

지하철을 두번씩 갈아타고 찾는 곳은 한 시중은행의 VIP지점. 지점 관계자는 "1백억원대를 굴리는 그야말로 VIP 고객" 이라고 귀띔하지만 생활은 의외로 질박하다.

70년대초 지은 대지 40평짜리 허름한 문화주택에 3대가 모여 살며 그 흔한 자가용승용차 한대도 없다.

30년 넘게 지업사를 경영해 온 그는 이같은 근면과 검소를 바탕으로 거액의 재산을 모았다.

한외종합금융 관계자는 "자수성가 (自手成家) 형 부자들은 대체로 호화.사치와 거리가 멀다.

세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과소비 행태는 부모 잘둔 덕에 방종하는 일부 비뚤어진 2세들의 몫" 이라고 지적했다

중앙일보 기획취재팀 손병수.홍승일.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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