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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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송재학(1955~ ),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水路를 따라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주네

결코 눈뜨지 마라

지금 한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떼 가득 찬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눈뜨면 여느 나비와 다름없이

그는 소리 내지 않고도 운다네

그가 내 얼굴을 만질 때

나는 새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치자 향기, 술패랭이의 분홍색, 나비 날개의 무늬, 저녁의 하늘빛… 이들이 내뿜는 감각의 힘만으로도 삶과 죽음은 만날 수 있다. 무덤가를 맴돌던 나비가 풋잠에 든 얼굴에 내려앉을 때, 그것이 돌아올 수 없는 이의 손길이라는 것을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그가 내 얼굴을 만질 때 죽음은 삶 곁에 숨 쉬고 있다. 시는 그 감각의 길을 따라 피어난 호접몽(胡蝶夢)이다.

나희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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