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아래아 한글' 진정 되살리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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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시장에서 퇴출위기에 놓였던 우리나라의 대표적 워드프로세서 '글' 이 회생 (回生) 의 전기를 맞았다.

한글과컴퓨터사 (한컴) 는 글지키기운동본부의 인수안을 전격수용, 우리의 힘으로 '글신화' 를 재건키로 뜻을 모았다.

글지키기운동본부는 1백억원을 한컴에 투자하고 공개모집을 통해 새 대표이사를 선임, 회사경영을 맡기기로 했다.

그동안 한컴을 이끌어 온 이찬진 (李燦振) 사장은 공동대표 겸 개발담당 책임자로 한글 및 신제품 개발작업에 전념키로 했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MS) 사와 진행해 온 인수협상은 포기키로 했다.

이같은 글 살리기는 글을 지키려는 국민적 여망에 따른 것으로 한글 소프트웨어업계의 자존심을 지키고 글 퇴출에 따른 경제.사회.문화적 파장을 피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무척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2백50억원이 넘는 부채와 취약한 시장기반 등 당장 눈앞에 닥친 과제는 만만치 않다.

1백억원의 투자로 급한 불을 끈다 해도 지속적인 경영안정에 문제가 있고, 최신 소프트웨어와 호환 (互換) 될 수 있는 새로운 국제화 버전 출시로 신규시장을 창출하는 일은 더더욱 쉽지가 않다.

미국 MS와의 투자협상 철회 또한 적지 않은 부담이다.

"의향서에 서명한 것으로 정식계약이 아니기 때문에 법률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없다" 고 하지만 글과 MS워드간의 문서호환성 향상에는 MS측과의 원만한 협력관계 유지가 필수적이다.

당초 MS측과의 협상은 외자유치 차원에서 정부당국도 이를 종용해 왔기 때문에 MS사 투자유치계획의 일방적 백지화는 한국기업의 신뢰도와 외국자본 유치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 또한 적지 않다.

한컴은 물론이고 정부당국 또한 이같은 한국적 특수성을 설명, MS측의 이해를 구하는 데 각별한 노력이 요구된다.

오늘의 글 위기는 해당업체와 소비자 당국 등 관련당사자들의 총체적 책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제에 한국 소프트웨어산업의 활성화를 막고 있는 제약요인들을 과감히 제거하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

애국심이나 사회적 온정만으로 부실기업을 살려낼 수는 없다.

이찬진 대표로 하여금 제품개발에 '백의종군' 케 한 것은 적절한 조치다.

정부의 벤처기업 육성정책도 구호를 넘어 실효성 위주로 개편돼야 한다.

고질화된 소프트웨어 불법복제 관행을 근절하지 않고서는 글은 물론이고 국산 소프트웨어의 앞날은 없다.

정부부터 소프트웨어 구입예산을 늘리고 정품 구매에 앞장서야 한다.

불법복제 차단을 위한 제도적 장치와 국민적 각성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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