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주를 열며]고시망국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나는 고등학생때 지망하는 대학 학과로 법과를 지망했었다.

그 시절 공부하던 책상 앞에 '축 서울대학 법과대학 합격 김진홍' 이란 글귀를 붙여두고 공부했었다.

법과대학으로 진학하려 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사법고시에 합격해 가문을 빛내고 빠른 시일에 출세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출세냐 창조적 삶이냐 그러나 막상 대학에 입학원서를 낼 때는 법학과가 아닌 철학과를 지원했다.

법과대학엘 가서 법조인이 되면 출세는 빠르겠지만 인생을 창조적으로 살고 멋있고 신바람나게 사는 데는 마땅치 않을 것 같아서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의 판단이 지금의 내가 보람있고도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는 데 기틀이 됐다고 여겨진다.

그때 법과진학→고시합격→판.검사→출세의 틀에서 벗어나 철학과로 진학하고 창조적인 삶에 나 자신을 투자했으므로 오늘의 내가 있게 됐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 고시에 대한 열풍은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뜨거워지고 있다.

너무나 많은 젊은이들이 전공과 관계없이 고시공부에 열중해 있기에 고시망국 (考試亡國) 이란 말까지 하게 됐다.

그런 말이 나오게까지 된 예를 살펴보자. 서울대에서 신림동네거리 방면으로 내려가면 소위 '고시촌' 이란 지역이 있다.

이곳에 무려 2백여개가 넘는 고시원이 있어 3만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고시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이들이 오로지 고시공부에 매달려 있는 이유는 고시합격이 개인의 출세와 가문의 명예를 빛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생 30% 고시공부 듣기로는 서울대 재학생들중에서 전공과목과 관계없이 30%가 고시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전국 70여 법과대학에서 매년 배출되는 7천여명의 졸업생들중 불과 4% 정도가 사법고시에 합격한다.

그럼에도 법학교육은 통째로 사법시험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런 현실은 법학교육에 있어 일종의 직무유기라 하겠고 대학교육이 타락한 현장이라고도 하겠다.

고시지망생들이 일단 고시촌에 들어오면 4~5년은 물론 더러는 10년이 넘도록 고시공부에 빠져들게 된다.

이로 인해 치르게 되는 개인적 손실은 말할 나위도 없겠거니와 그들을 뒷바라지하는 가족들의 희생은 어떠하겠으며 국가적 손실은 얼마나 크겠는가.

발표된 한 자료에 의하면 고시생들중 21%가 신경성 두통으로 시달리고 있고 15%는 위염.위궤양 등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운동부족 탓이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과거 (科擧) 제도가 있었다.

그때도 전국의 숱한 지식인들이 과거시험에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과거시험에서 뽑힌 수재들 중의 수재들이 벼슬길에 올라 나라를 어떻게 경영했던가.

우물안 개구리 모양으로 세계를 모르고 헛되이 자리다툼만 하다가 끝내는 나라를 빼앗기는 역사를 겪게 됐다.

19세기말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세계가 바뀌는 동안에 이 땅의 벼슬아치들은 세상변하는 줄 모른 채 있다가 나라를 잃었던 것이다.

도전적 일에 눈 돌려야 이제도 마찬가지다.

20세기말에 이른 지금은 산업사회에서 정보산업사회로 시대가 바뀌어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 한국의 수재들이 하나같이 육법전서에 매달려 있다면 장차 이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의 실리콘 밸리에는 수많은 미국의 수재들이 벤처산업에 도전하고 있다.

그래서 10, 20대에 세계적인 기업들을 창출하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해마다 수십만명의 젊은이들이 공과대학을 나와 엔지니어로 제조업 현장에서 신상품을 만드는 일에 땀을 흘리고 있다.

그런데 이 땅의 수재들은 고시촌에 모여 허구한 날 법전을 뒤적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수고해 합격됐다 치자. 그들이 지도자가 돼 정보산업시대에 어떻게 국가경영을 감당해 나갈 수 있겠는가.

육법전서를 통째로 다 외운들 그 실력으로 어떻게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 시대를 극복할 것이며 어떻게 통일한국시대를 이끌어 갈 것인가.

김진홍(목사.두레마을 대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