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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의 그린수기]6.투견장서 강한 여자 단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나는 요즘 해피라는 강아지와 함께 다닌다.

US여자오픈대회 우승 전인 지난 6월말 3백50달러를 주고 산 비글종의 애완용 암컷 강아지다.

요즘은 부모님과 동행하고 있지만 이전에는 갤러리들의 환호성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와 빈방에 혼자 들어설 때면 외로움이 찾아들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해피를 보고 싶은 생각에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곤 한다.

아버지는 내가 해피를 데리고 다니는 걸 보시곤 달가워하지 않는 표정이다.

아버지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지만 내가 투견용의 사나운 개를 키우기를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골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나를 가끔씩 투견장에 데리고 갔다.

나는 투견장 맨 앞줄에 앉아 처절하게 사투를 벌이는 장면을 끝까지 지켜봐야 했다.

주로 암캐와 수캐가 싸우는 장면이었다. 개들은 으르렁거리며 서로 물고늘어졌다. 피가 튀고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갔다. 속이 니글거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너무도 처참한 장면에 뛰쳐나오려고 몇번이나 몸을 일으켰지만 그 때마다 아버지는 더더욱 나를 세게 주저앉혔다.

나는 나 혼자만을 위해 이런 장면을 견뎌낸 것은 아니었다.

나를 이렇게 기묘한 방법으로까지 단련시키려는 아버지의 집념을 이해하고 있었다.

"저 암캐를 잘 보아라. 진짜 승자의 자세는 바로 저런 거야. 느긋하게 상대를 놀리는 듯 여유를 부리지. 그러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거야. 그러다가 상대의 허점이 보이면 인정사정없이 달려들어 단박에 박살내지. " 내가 지독한 탓일까. 내 눈에도 멋진 승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슬슬 피하는 듯 유연하게 움직이다 날렵하게 덤벼들어 상대의 다리를 한번 물어 기선을 잡은 뒤 목덜미를 물고 흔들어대는 암캐. 나는 어느덧 그 암캐가 멋있어 보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싸움 잘하는 개는 보통 암캐라는 것도 주지시켰다.

"여자는 남자보다 더 강할 수 있어. 여자라고 찔찔 눈물을 보이거나 응석을 부리려면 아예 그만두어라. " 아버지는 절대 상대방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했다.

한번 나약해지면 한없이 나약해지는 것도 여자의 속성이라고 했다.

나는 어느덧 내가 여자아이라는 것을 잊게 됐다.

아니 여자이기 때문에 더욱 강하게 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그리고 승자의 멋진 자세도 익힐 수 있었다.

나와 함께 플레이를 한 선수들은 "어쩌면 그렇게 흔들림이 없느냐" 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나를 포커페이스라고도 부른다.

나는 상대 선수가 스윙할 때 지켜보기만 할 뿐 연습 스윙을 하지 않는다.

내 차례가 돼서야 준비를 한다.

때문에 플레이가 느린 편이라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투견장에서 익힌 승자의 자세에서 나온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아버지는 내가 해피를 끼고 다니는 것을 보시고 "저녀석이 마음이 여려진 게 아닐까" 생각해 나를 다시 투견장으로 데려가시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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