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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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듣기 거북하더라도 알 수 없다는 말 한마디만 합시다.

욕조에다 뜨거운 물을 채우고 몸을 담그는 순간, 나는 객지를 떠돌다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것 같은 안도감을 느꼈고 마음도 더 없이 평온했습니다.

더욱이나 여자가 도어 밖에서 취중에는 목욕 오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의까지 주었을 때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착각이라고 생각했던 것조차 무의미해졌습니다.

그 여자가 한 번 놀아보기 위해 나를 객실로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도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어요. 그 결심이 무너진 것은 목욕을 마치고 침실로 나서고부터였습니다.

여자는 어느새 잠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어요. 몸의 굴곡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얇은 천으로 만든 옷이었어요. 가슴도 패어 있어서 유방도 반쯤 밖으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태도가 대담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어쩐 셈인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은 없었어요. 항상 그래 왔었다는 느낌이 오히려 강했지요. 여자는 나더러 자기가 어떠냐고 애매한 말로 물었어요. 나는 속으로 당황했지요.야바위판처럼 이거다, 저거다를 판단하기 위해 여자의 육체를 관찰해야 하는 경우는 난생 처음 겪는 사건이었거든요. 나이를 물어보진 않았지만 여자가 사십대 중반이라는 것은 확실하지 않았습니까.

여자의 몸매는 이십대 젊은이처럼 터질 것 같은 탄력을 가졌다거나 굴곡이 아름답다거나 매력적인 포인트가 눈에 띄는 것도 아니었어요. 뭐랄까, 그렇고 그런 평범한 몸매였어요.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죠. 여자가 물었던 질문의 골자는 겉으로 노출되어 있는 몸매의 밉고 고운 것을 물었던 게 아니라 지금 잠옷을 입고 서 있는 그 자리의 도덕성을 내게 물어봤던 것 같습니다.

그건 내게로 던지는 질문도 같이 포함되어 있었겠지요. "

그때, 변씨는 앞질러 물었다.

"그래서 그 여자의 신분이 어떤지 물어 보기도 전에 침대로 나가자빠졌나?" "말씀을 꼭 그렇게 씹어뱉듯 해야 성에 찹니까? 태호도 듣고 있는데 말씀이 끝내 상스러워야 하겠습니까?" "여자의 신분도 알기 전에 구멍부터 파고 들었느냐는 말이 상스럽다고? 고상한 놈들은 눈길에 마주치는 여자는 이름조차 안 물어보고 치마부터 벗기나? 그게 먹물 먹고 살았다는 위인들이 줄창 씨부려 쌓는 순리라는 게여?"

"도대체 왜 말 끝마다 트집을 잡고 늘어지는지 참으로 알 수 없네요. 그 여자가 형사과에 불려온 피의잡니까? 설혹 자기 본색을 까발리지 않는다 해도 첫 인상에서 됨됨이를 대강은 짐작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나는 누굽니까? 잘나봤자 행상꾼 아닙니까. 분수껏 행동했다는 것인데 무슨 억하심정이 또 있습니까. "

"태호, 차 천천히 몰아. 시간 충분해. "

"두 사람이 모두 목욕을 마치고 침대에 나란히 눕긴 했습니다만, 형님 말처럼 다짜고짜 구멍부터 파고 들진 않았습니다.

내 기분을 다치지 않으려 여자는 무척 애쓰는 편이었어요. 근본이 천박한 여자도 아니었고, 딱이 엉뚱한 꿍심을 가졌단 낌새도 느낄 수 없었고, 떠돌이들을 상대로 잠자리나 즐기고 차버리자고 나를 객실로 불러들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욱 확실해졌어요.

그렇다면 나를 사랑해서였을까요? 내스스로에게 그렇게도 물어보았습니다만 그 또한 꼭 그렇다곤 할 수 없었지요. 여자에게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인상은,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지금 내게 주어진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렇게 마음 먹고 나니까 침대에 눕고부터 다시 고개를 들었던 뒤숭숭하던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우린 서로 애무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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