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비정규직의 고통을 시험하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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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비정규직법이 오늘부터 시행된다. 이제부터 고용한 지 2년이 되기 전에 계약을 해지하는 사태가 이어질 것이 뻔하다. 그 숫자가 1년 동안 70만 명이 넘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그런데도 국회는 개정안 처리는커녕 상임위에 상정조차 못하고 있다. 1년이 넘게 공방만 벌이는 동안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가장 힘없는 비정규직에게 돌아가게 돼 있다.

여야가 협상을 계속하고 있고, 한나라당은 김형오 국회의장에게 직권 상정해 처리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설사 그렇게 처리되더라도 현행법과 개정법안 사이에서 끼어 있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억울한 피해를 보는 셈이다. 헌법을 어기면서 소급 입법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 피해가 불가피한 것도 아니고, 정치인들이 명분 싸움을 벌이다 그 후유증을 서민에게 떠안기는 것이니 고약하기 이를 데 없다.

민주당은 비정규직을 해고해도 다른 사람을 또 고용할 테니 총 고용량에는 영향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경제상황이 좋을 때 이야기다. 정부 추산으로는 앞으로 1년 동안 100만 명 정도가 실업의 대상이 되고, 그중 70여만 명 정도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한다. 민주당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기간에 겪는 고통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다. 2년마다 새로운 일을 찾고, 적응해야 하는 부담도 만만치 않다. 그렇게 해서 숙련도가 떨어지면 정규직으로 전환할 기회도 멀어진다. 숙련도가 떨어지는 새 근로자를 고용해 교육하는 데 드는 사회적 비용도 엄청나다.

법안 내용에 대한 시비를 떠나 1년이 넘도록 상정조차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정당마다 의견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놓고 서로 토론하고 협상해 합의점을 만들어가는 것이 정치다. 법안이 자기 의견과 다르다고 상정조차 않는다면 국회가 어떻게 기능할 수가 있는가. 추미애 환경노동위원장은 사회적 합의를 해오면 상정해 주겠다고 한다. 국민의 대표로 뽑힌 국회의원들이 심의할지 여부를 이해당사자에게 허락을 받아 오라니 어이가 없다. 추 위원장은 이 법안 외에도 상임위에 제출된 법안의 72%를 상정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민주당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도대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비정규직법은 ‘사회적 합의’로, 미디어법은 ‘여론조사’로 결정하자고 한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 국회를 구성해 주었으면 그 틀에서 논의하고, 국회법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정도다. 그런데 다수결은 부정한다. 오죽했으면 민주당 소속 김성곤 의원이 “국회의원은 투표의 다수결로 뽑혀왔다. 그런데 국회에서는 이 간단한 다수결 투표가 부정되고 국민들 보기에 부끄러운 몸싸움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탄했겠는가. 선거에서 져 소수당이 되었다고 국회의 정상적인 의사 절차를 부정하고, 국회 밖 응원군에게 결정권을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민의 심판인 선거 결과에 대한 불복이고, 대의민주주의의 근본에 대한 부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