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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리 교육’과 ‘초식계 젊은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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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일본의 패션 디자이너 다카다 겐조(70).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KENZO’를 만든 주인공이다. 그는 1970~80년대 획기적 디자인으로 패션의 본고장 프랑스 파리를 석권했다. 세계 최대의 패션쇼 파리 컬렉션의 피날레는 늘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는 93년 ‘KENZO’ 브랜드가 루이뷔통의 모회사 LVMH 그룹에 인수된 후 잊혀진 인물이 됐다. ‘KENZO’도 다카다 겐조와 전혀 무관한 브랜드가 됐다. 좌절한 그는 ‘KENZO’ 매장 앞에서 “이게 아닌데” 하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런 그가 최근 인생 재출발을 선언했다. 이달 초 평생 수집한 미술품을 팔고, 집도 매각했다. “원점에서 인생 제2막에 도전하기 위해서”란다. 어디 겐조뿐이랴. 일본의 중년, 노년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야말로 일본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임을 알 수 있다. 공사판에서도, 사회봉사에서도, 평화헌법 개정 반대 시위 현장에서도 그들은 늘 활력과 도전의식에 넘쳐 있다.

반면 요즘 일본 젊은이들을 보면 “영 아니다”란 생각이 든다. 아무 일도 안 하면서 좋은 일자리가 생기기만을 기다리는 청년 ‘니트(NEET)족’은 매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야심도 의욕도 없어 보인다.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이데이 노부유키 전 소니 회장은 “일본의 미래를 포기한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탄했다.

‘초식계 젊은이’란 용어까지 등장했다. 원래 이성 교제나 성욕에 담담한 쿨(cool)한 젊은이를 뜻하던 이 용어는 이제 ‘육식’(사회적 성공이나 도전)은 아예 꿈꾸지도 않고 그냥 풀이나 뜯어 먹는 것에 만족하는, 특징 없는 젊은이를 지칭하게 됐다. 결혼도 꺼리고 유학도 꺼리고 창업도 꺼리는 식이다. 실제 ‘창업을 하고 싶다’는 일본 젊은이의 비율은 10년 전 29%에서 올해는 8%로 떨어졌다. 원인은 자명하다. 교육과정을 대폭 축소한 ‘유토리(여유) 교육’ 때문이다. 2002년부터 본격 시행된 유토리 교육은 평준화란 명분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결국 학력 저하와 더불어 도전과 경쟁에 고개 돌리는, 무기력한 ‘판박이 젊은이’를 양산하고 말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중도강화론’의 일환으로 사교육을 잡겠다고 나섰다. 학원의 교습시간 제한 등 다양한 안들이 나온다. 서민의 부담을 줄인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다만 한국의 청년 니트족이 청년 실업자(32만8000명)의 세 배가 넘는 113만 명으로 치솟고 있다는 점도 결코 간과해선 안 된다.

취업할 생각을 않는 니트족이 이처럼 급증한 것은 과연 사교육이 세고 공교육이 약해서였을까. 모두가 똑같이 대학 가야 하고, 좋고 편한 직장만 가야 한다는 의식을 조성한 획일적 교육, 나아가 사회 시스템에 보다 근본적 원인이 있는 건 아닐까. 일본이 뒤늦게 유토리 교육 뿌리뽑기에 나선 데는 이유가 있다. 평준화의 부산물, 초식계 젊은이를 결코 남의 나라 일로 볼 것이 아니다.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