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부실은행 정리 의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은행도 망할 수 있다' 는 평범한 상식이 국내금융사상 처음으로 현실화됐다.

이미 예고된 것이긴 하지만 금융계에 미치는 파장은 매우 클 듯하다.

우선 은행수가 줄어드는 대신 우량은행은 더욱 덩치가 커져 선도은행 (리딩뱅크) 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 수도 있다.

특히 부실은행을 인수하는 은행은 자산규모를 키우고 영업망을 한꺼번에 넓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된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우량은행 주주들의 반발이 없도록 부실은행의 우량자산만을 골라내 인수시키기로 했다.

자산.부채인수 (P&A) 방식에 따르면 부실채권도 일부 이전시킬 수 있지만 이번엔 확실하게 깨끗한 우량자산만 넘기기로 한 것이다.

구조개혁기획단 연원영 (延元泳) 총괄반장은 "이를 넘겨받을 경우 대형 '클린뱅크' 가 될 수 있다" 고 표현했다.

더구나 일정기간중 우량자산에 섞여 있던 잠재부실이 튀어나오면 이것도 전액 정부가 보전해주기로 했다.

우량은행을 자동적으로 더 우량하게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다.

반면 금감위는 주주의 경영책임을 확실히 묻는다는 차원에서 주주들에 대한 별도 보상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부실은행의 주주들은 은행이 사라지는 바람에 출자금을 모두 날리게 됐다.

이는 조흥.상업.한일.외환 등 기존 대형은행에 상당한 자극제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들은 이미 국제결제은행 (BIS) 자기자본비율이 8%에 미달돼 경영평가를 받아 자구노력을 해야 할 입장이다.

지금 상태로는 대형은행은 되겠지만 우량은행이 되기는 어렵다.

자칫하면 리딩뱅크의 지위를 빼앗기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이들 사이에 대형 우량은행으로 변모하기 위한 자발적인 합병노력이 번질 것으로 예상된다.

금감위도 이를 노리고 있다.

이를 위해 금감위도 상당한 대가를 치르기로 각오했다.

부실자산은 모두 성업공사가 떠안기로 했고 예금도 정상 지급해주기로 했다.

여기에 드는 돈은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해서라도 메우기로 했다.

나중에 상환부담이야 어찌됐든 당장 돈으로 막기로 한 것이다.

이는 고스란히 국민부담으로 돌아오지만 금융시스템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해볼 만하다는 것이 금감위 판단이다.

그러나 그동안의 과정을 보면 문제점이 하나 둘이 아니다.

부실은행의 선정단계에서부터 정치논리가 개입돼 투명성.객관성이 많이 훼손된 것이 사실이다.

우선 평화은행의 경우 근로자은행이란 점이 감안돼 BIS비율이 차등적용돼 살아남게 됐다.

동화은행도 실향민들의 출자은행이란 점때문에 정치권에서 회생시켜야 한다고 들고 나왔다.

충청권 지방은행의 경우 자민련에서 지역은행 살리기 운동에 참가하는 등 바람잡기에 나서 평가위원들을 압박했다.

또 처음 겪는 '사건' 이므로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아 실무적으로도 트러블이 있었다.

제대로 하자면 극비의 보안속에 적어도 발표 20일전부터 철저한 도상연습을 해야 한다.

그러나 도중에 보안이 지켜지지 않은 데다 정리대상 은행의 폭이 좁혀져 누구나 상식적으로 점칠 수 있는 단계가 되고 말았다.

남윤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