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그리 골프는 강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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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호 16면

“니들, 한국 복싱이 잘나가다 요즘 왜 빌빌대는 줄 아나. 다 헝그리 정신이 없기 때문이야. 옛날엔 라면만 먹고도 챔피언 먹었어.”

정제원의 캘리포니아 골프 <65>

1997년 개봉했던 영화 ‘넘버3’의 한 장면이다. 불사파 두목 송강호가 졸개들을 모아 놓고 일장연설을 하던 그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적지 않았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스포츠에서 헝그리 정신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처럼 여겨졌으니까 말이다. ‘팔육’ 아시안게임과 ‘팔팔’ 올림픽을 앞두고 우리는 얼마나 헝그리 정신을 강조했던가. 그런데 궁금증이 생긴다. 골프에서도 과연 헝그리 정신은 통하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스’다. 적어도 필자의 생각엔 그렇다.

KLPGA투어에서 활약 중인 유소연(19)의 경우를 보자. KLPGA투어 상반기 대회에서 3승을 거두며 다승 부문 선두로 나선 유소연은 언제나 싹싹한 태도가 돋보이는 선수다. 항상 웃고 다니고 인사성도 밝은 편이다. 그렇지만 유소연이 정상급 프로선수로 올라서기까지 헝그리 정신이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최근 유소연을 만난 자리에서 가정형편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는 쑥스럽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가정형편이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요. 대회 출전 경비를 걱정할 정도였으니까요.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만사 제쳐두고 제 뒷바라지를 해 주신 부모님을 위해 쓰겠다고 다짐했어요.”

중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부유한 형편이었던 유소연은 고교에 진학한 뒤 가세가 기울면서 골프를 계속하는 데 애로를 겪었다고 털어놓았다. 50~60년대처럼 끼니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선수가 적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사춘기 소녀의 가슴엔 응어리가 졌을 만도 하다.

유소연과 동갑내기인 최혜용도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난 경우다. 최혜용은 라운드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한밤중에 골프장에 들어가 승용차 라이트를 켜 놓은 채 연습하기도 했다. 어두운 곳에서 샷을 하니까 집중력이 더 생길 수밖에 없었다.

헝그리 정신을 갖고 골프를 한 선수가 유소연과 최혜용뿐일까. KPGA투어의 최고령 선수인 최상호(54) 프로는 심야에 골프장에 몰래 들어가 ‘도둑 골프’를 한 경우다. 휘영청 밝은 달을 라이트 삼아 샷을 가다듬었던 것이다. 비싼 골프공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한 샷 한 샷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고백이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전설’이다.

PGA투어 7승에 빛나는 최경주가 어린 시절 전남 완도의 바닷가에서 샌드웨지가 닳을 때까지 벙커샷을 단련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 레슨비를 마련하려고 연습장 볼보이를 했던 양용은은 결혼 후에도 월세 15만원짜리 방에서 살면서 의지를 다졌다. 신지애는 어머니 목숨과 바꾼 돈 700만원을 밑천 삼아 대회에 나섰던 케이스다.

21세기에도 헝그리 정신 타령이냐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게다. 그러나 적당한 배고픔이 성공의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넘버3에서 나왔던 대사를 떠올려 본다.

“컵라면 먹던 시절, 산에서 뱀 잡아먹고 개구리 잡아먹던 시절, 절대로 잊어선 안 돼. 모든 걸 정말 열심히 진지하게 해야 돼. 잠자는 개한테는 결코 햇볕은 비추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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