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코트 떠나는 현주엽 농구인생 20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현주엽이 26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은퇴 심경을 밝히고 있다. 현주엽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중국을 꺾고 우승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했다. [성호준 기자]

현주엽(34)은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4년 동안 정들었던 체육관에 들어왔다. 11년 전 “선배들이 외국인 선수들을 너무 어려워하는 것 같다”는 당찬 발언과 함께 프로에 왔지만 고질적인 무릎 부상 때문에 꽃을 피워보지 못하고 24일 은퇴를 했다. 그는 “명예 회복을 하고 은퇴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지 못해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26일 서울 방이동 LG체육관에서 그를 만났다.

-원래 포인트가드가 꿈이지 않았나.

“고교 때까지 포인트가드였는데 고려대 때 뛰어난 가드인 신기성과 함께 경기하다 보니 파워포워드가 됐다. 이후에도 항상 가드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키 큰 선수는 골밑으로 가야 한다는 한국 농구의 여건이 나를 가드가 되게 허락하지 않았다. 나름대론 공 치고 운반하는 것만이 가드가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어느 자리에 있다고 가드가 아니라 경기의 흐름을 읽고 조율할 줄 알아야 좋은 가드라고 생각한다.”

-몸이 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센스는 다른 가드들보다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 전업 가드를 했다면 ‘아주 잘’ 했을 것 같다. 몸이 큰 게 실망스럽진 않지만 오히려 더 컸다면 외국인 선수들과 더 잘 싸울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의 찰스 바클리라는 별명이 있는데 그보다는 매직 존슨이 롤모델인 것 같다.

“매직 존슨을 보고 농구를 시작하게 됐다. 뒤에 눈이 달린 것 같았고 득점부터 어시스트, 리바운드까지 모든 걸 다 하더라. 바클리도 뛰어난 선수라 한국의 바클리도 영광이지만 우승을 못했다. 존슨이 더 뛰어나다. 내가 좀 더 잘했다면 한국의 매직 존슨이라는 별명을 들었을 텐데.”

-인생 최고의 게임은.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중국과의 결승이다. 기적 같은 역전승을 했는데 중국은 팀플레이를 안 하더라. 종료 직전 후웨이동이 골밑의 야오밍에게 패스를 했다면 우리가 졌을 텐데 그냥 슛을 던져버리더라. 반대로 우리는 하나로 똘똘 뭉쳐서 이길 수 있었다.”

-무릎은 언제부터 아팠나.

“군대 가기 전인 2001년쯤 다리가 부러지면서 무릎을 다쳤다. 이후 어긋난 무릎뼈가 연골을 파먹어 아시안게임 직전에 수술을 했다. 의사가 아시안게임에 뛰지 말라고 했는데 뛰는 바람에 고질병이 된 것 같다 .”

-아시안게임에 뛴 걸 후회하나.

“아니다. 선수는 눈앞에 경기가 있으면 뛰고 싶은 본능을 참지 못한다. 그 경기에 뛰었기 때문에 중국을 이기고 금메달을 땄고 이나마 은퇴할 때 명예와 기억할 수 있는 경기가 남아서 기쁘다.”

-당시 상무 선수여서 병역 혜택도 못 받지 않았나.

“복무 중 선수는 면제가 안 된다는 규정 때문이다. 김승현과 방성윤은 면제가 됐는데 1년 동안 매일 술 사겠다고 해놓고 한 번도 안 사더라. 그래도 난 상병 때여서 좀 낫다. 이규섭과 조상현은 이등병이라 더 억울했을 것이다.”

-서장훈과는 같은 팀에서 뛴 후 함께 은퇴하자고 의기투합했다는데.

“휘문중에서 동시에 농구를 시작하고 프로(SK)에서도 함께 시작했기 때문에 함께 끝내는 것이 좋겠다고 장훈 형이 제안했다. 내가 2~3시즌 더 뛰었다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 같다.”

-서장훈과 달리 심판에게 항의를 안 하고 너무 신사적이어서 승부욕도 부족하고 우승도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항의한다고 번복되는 경우는 없다. 물론 화가 난다. 지고 기분 좋은 선수는 없다. 그래도 난 손해 좀 보더라도 스포츠는 깨끗해야 한다고 믿는다. 항의하면 내 흐름이 끊어지는 단점도 있다.”

-지난 플레이오프에서 팀 후배 기승호가 상대 고참으로부터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상대가 명백히 잘못하고 심판으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았다면 우리도 대응을 해야 하지만 내 생각에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픽 크게보기>

성호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