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안보에는 ‘내부의 적’이 더 해롭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5면

6·25가 발발한 지 59주년이 됐다. 이 전쟁으로 60만 명이 넘는 인사가 죽거나 납치를 당했다. 동족상잔의 비극과 그 고통은 지금도 무거운 역사의 짐이 되어 우리 민족을 짓누르고 있다.

북한의 대남 도발은 1950년 당시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것이 외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이 있다. 남한 내에서 박헌영이 주도한 남로당의 활동으로 공산당에 가입한 인원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점이다. 1949년 6월 북한에서 결성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남로당의 보고서를 기초로 한 판단에 따르면 남로당 당원 수가 5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특히 이들에 대한 동조자는 남한 인구의 65~70%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일성은 이를 바탕으로 해 남침계획을 수립했던 것이다.

북한군은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운 월등한 군사력으로 38선을 돌파했다. 그러고는 서울 점령 후 사흘 동안 전국 각지에서 인민봉기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미 남파된 인민유격대와 연계해 작전을 기도하던 빨치산이 국군과 경찰의 소탕으로 세력이 상당히 약화된 뒤라 김일성이 기대했던 대규모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남한 내에 공산주의 동조자가 많았다는 정보가 전쟁이 난 원인 중의 하나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만약 당시에 남한이 든든한 안보체계를 다지고 국민들이 반공의식으로 뭉쳐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면 김일성의 무모한 군사도발은 실행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들의 안보의식이 얼마나 엄청난 재앙을 초래하는지는 베트남전쟁의 사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베트남은 4.5%의 공산주의 지배지역이 95.5%의 자유민주주의 지역을 몰아냈다. 남베트남의 국민들은 정국이 혼란해지자 학생·종교인·기업가 등으로 나뉘어 각각 집단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 나섰다. 고관대작들과 부유층은 돈을 외국으로 빼돌렸다. 정부기관은 물론 군과 경찰·정보기관에 북베트남의 프락치가 침투해 활개를 쳤다. 대통령 보좌관도 간첩이고, 군 장성도 간첩이었다. 정부는 간첩 잡는 일을 아예 포기했을 정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반 국민들까지 북베트남과 그곳의 지도자 호찌민을 선망하게 됐고 베트콩을 지원하는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의 배후세력으로 변했다. 남베트남 국민들은 NLF의 전략에 사상적으로 무너져내려 어느새 스스로를 향해 총칼을 겨누는 내부의 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세계 4위의 공군력을 비롯해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고 있던 남베트남은 건국 20년 만인 75년 패망했다.

북한의 대남 위협은 지금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남베트남 패망 후 북한은 4대 군사노선을 더욱 강화, 군사력 증강에 전 국력을 기울였다. 최근엔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위협하며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특히 ‘혁명의 성숙기’가 오면 단기 결전으로 남쪽을 적화시킨다는 전략은 변함없다. 화해협력으로 위장한 통일전선전술로 남쪽의 혼란을 끊임없이 획책하려는 전략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통일전선전술에 의한 혁명의 성숙기가 도래했다고 북한지도부가 오판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안보의 중심점이 돼야 한다. 총을 든 적군보다 총은 없지만 내부를 교란하는 적이 더 무서운 것이다.

서경석 고려대 객원교수 예비역 육군 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