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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울분의 스포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축구는 원래 다분히 호전적인 경기다.

발상지인 영국에서 축구의 뿌리는 4세기 이곳에 주둔하던 로마병사들이 전한 하패스턴 (harpaston)에 있다고 한다.

11세기 노르만에 정복을 당한 뒤 노르만인의 두개골을 파내 이 경기를 하며 울분을 푼 데서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이 경기가 너무 거칠어지는 바람에 16세기에는 법령으로 금지한 일까지 있었다니 오늘날 훌리건의 전통 역시 여간 뿌리깊은 것이 아니다.

1862년체계적인 규칙이 만들어지고 이듬해 축구협회가 결성된 것이 근대축구의 출발점이다.

말하자면 근대 스포츠로서 틀을 갖춘 것이 영국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이것이 대영제국의 위세를 타고 온 세계로 전파된 결과 축구 종주국으로서 영국의 위상이 세워진 것이다.

적당한 물건을 발로 차며 벌이는 경기는 그 전에 여러 곳에 있었다.

이런 예로 우리나라에는 '삼국유사' 에 '축국 (蹴鞠)' 의 기록이 있다.

김유신이 축국 경기를 하다가 짐짓 김춘추의 옷자락을 밟고는 자기 집에 청해 터진 옷을 누이동생이 꿰매주도록 함으로써 정분이 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책략의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중세 영국의 하패스턴에 비하면 밝고 흥겨운 분위기를 전해주는 얘기다.

고려시대 단오절에 축국 경기가 성대하게 열린 일은 '용비어천가' 에 상세히 적혀 있다.

말을 타고 채로 공을 몰았다니 오늘날의 폴로에 가까운듯한데, 왕 이하 온 도성사람들이 모두 모여 구경하는 화려한 행사였다.

배지 (排至).디피 (持彼).귀견줌 (比耳).수양 (垂揚) 등 기술적 용어까지 전해주는 것을 보면 상당히 체계화된 경기였던 모양이다.

우리는구한말 서양인들을 통해 근대축구에 접하게 됐지만, 널리 보급된 것은 합방 후 일본인들을 통해서다.

원로 축구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조선 축구인들은 일본인을 축구로라도 이기려 절치부심했다니, 배우지 않고도 영국 하패스턴의 전통을 깨달았던가보다.

네덜란드에 참패를 당한 뒤 터져나오는 얘기 중 승부에만 집착하는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 그럴싸하다.

그러나 우리 '붉은 악마' 들이 기가 질릴 정도인 '축구선진국' 팬들의 극성을 보면 축구의 호전적인 본성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옛 축국의 전통을 살려 '동네축구' 라도 흥겨운 마음으로 즐기면 좋을텐데, 축구에서라도 세계일류를 확인하려 드는 우리 마음 역시 식민지시대에서 얼마나 바뀐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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