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부실퇴장…벼랑에 몰린 한일합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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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국내 합성섬유의 대표주자인 한일합섬이 과연 닻을 내리게 되는가. 한일그룹의 모기업인 한일합섬이 18일 금감위가 발표한 퇴출대상에 포함됨으로써 그룹 자체가 공중분해될 위기에 몰리고 있다.

한일측은 이같은 낌새를 알아채고 지난 15일 김중원 (金重源) 회장이 직접 기자회견을 자청해 국제상사와 한일합섬을 통합하고 나머지 계열사를 모두 매각하는 내용의 구조조정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표는 주거래은행인 한일은행과 합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급작스레 이뤄진 것이어서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만큼 다급했던 것이다.

한일측은 한일합섬이 퇴출대상에 오르자 매우 당혹해하는 표정이다. 관계자들은 "충격적이다" 며 말을 잇지 못했고 1천5백여명의 종업원들도 일손을 놓은 채 어수선한 분위기다.

한일측은 그러면서도 이미 구조조정안을 발표했고, 금감위원장도 통폐합을 통한 퇴출도 가능하다고 한 만큼 당초 계획대로 국제상사와의 합병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국제상사의 재무구조가 튼튼하지 못해 합병은 어렵다는 게 금융권의 견해이고 보면 이같은 한일측의 의지는 '희망사항' 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합병을 하려면 은행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한일합섬을 퇴출대상에 집어넣은 은행측이 이를 들어줄 가능성은 작다는 것이다.

올해 창업 34년을 맞는 한일합섬의 자본금은 지난해말 9백80억원, 부채는 1조1천4백억원으로 이미 자산 (1조3천8백56억원)에 육박하고 있다.

그룹 전체도 어려워 한일그룹의 지난해말 기준 총매출액은 1조2천7백45억원에 달하지만 총자산 수익률은 마이너스 7%였다. 부채비율도 1천39%로 그동안 빚으로 연명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한일그룹은 현 김중원 회장의 선친인 김한수 (金翰壽.82년 작고) 회장이 부산에서 원단을 취급하던 경남라사를 모태로 출범했다.

지난 56년 경남모직, 64년에는 합성섬유 붐을 타고 한일합섬을 설립했다.

한일합섬의 주 생산품목은 아크릴사. 양모 대체품으로 한때 옛소련.동구권.유럽 등 추운 지방으로의 수출이 활기를 띠면서 73년 단일업체로는 국내 최초로 '1억달러 수출의 탑' 을 수상하기도 했다.

섬유호황을 타고 성장을 거듭해 왔으나 80년대 이후 선진국의 천연섬유 선호와 동구권의 몰락 등을 계기로 수출판로가 막히면서 급격한 사양화를 겪게 됐다.

한일그룹은 이후 사업다각화에 나서 86년 국제그룹 계열사인 국제상사.남주개발.신남개발 등을, 87년 비료생산업체인 진해화학을 인수했다.

이어 96년에는 부도난 우성건설 인수를 추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인수.합병으로 성장한 기업' 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김중원 회장과 중건.중광.중명 등 4형제가 17개 계열사를 쪼개 가지면서 (94년) 金회장이 한일합섬을 포함한 7개 계열사로 그룹을 재정비했다.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체제 이후 5백억원의 협조융자를 받았으며 5월에는 우량기업이었던 동서석유화학의 지분을 매각하고 신남.남주개발을 미국 홀딩사에 매각키로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번 퇴출기업 명단에 합섬과 신남.남주개발, 진해화학까지 포함됨으로써 '재기의 꿈' 은 물거품이 될 전망이다. 이로써 한일그룹에는 통도 컨트리클럽 골프장 (한일리조트) 과 국제상사 등 모태와는 거리가 먼 2개의 기업만 남게 됐다.

한편 또다른 모기업격인 김중광 회장 소유의 경남모직도 지난해말 화의를 신청함으로써 한국 섬유사의 태두격인 한일그룹의 신화가 사라질지도 모를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양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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