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31. 육 여사와 박 실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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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낸 박종규 전 대한체육회장이 198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출된 뒤 선서를 하고 있다.

1969년 봄 기업은행 코치를 맡은 직후였다. 청와대 박종규 경호실장이 "한번 만나자"고 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자의 연락이라 황급히 달려갔다. 널찍한 대기실에 앉아서 기다리자니 절로 오금이 저렸다.

그는 다른 손님을 배웅한 뒤 대기실에 함께 있던 장관보다 나를 먼저 부르더니 집무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는 대뜸 "김 코치 월급이 얼마야?"라고 물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는 "여자농구팀을 지도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66년 런던 월드컵에서 북한 축구가 8강에 오르자 "북한을 꺾으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67년 중앙정보부에서 일급 축구선수들을 모아 '양지'라는 팀을 만들어 운영했다. 이를 지켜본 육영수 여사가 세계를 제패할 만한 여성 스포츠 종목을 골라 집중 육성해보라고 지시해 여자농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농구 해설자로도 활약하던 나를 지도자로 점찍었다고 했다.

그는 내게 월급을 세배로 올려주고 승용차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나는 여자농구를 지도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특별한 목적으로 팀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은 그 종목을 퇴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축구의 경우 양지팀으로 인해 다른 실업팀이 잇따라 해체되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앞에서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일주일만 여유를 달라"고 한 뒤 청와대를 나왔다. 그리고 이병희 농구협회장과 민관식 체육회장을 만나 박 실장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박 실장은 정우창 기업은행장을 통해서도 내게 압력을 넣었다. 정 행장은 나를 불러 "도대체 무슨 일이야. 무조건 박 실장의 말을 들어줘. 매일 전화로 성화야"라고 하소연했다. 나는 박 실장을 다시 만나 "하겠다. 그렇지만 여자는 정말 자신이 없다. 여자농구 지도 경험이 풍부한 다른 지도자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설득했다.

결국 청와대에서 주도한 여자농구팀 창단은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다. 그렇지만 농구에 대한 육영수 여사의 깊은 관심과 사랑은 여전했다. 언젠가 국제대회를 마치고 청와대로 인사를 갔었다. 육 여사는 반가운 얼굴로 내 손을 잡고 "농구를 하면 정말 키가 크나요?"하고 물었다. 중학생인 아들 지만의 키가 작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내게 지만의 농구지도를 부탁했다. 하지만 국가대표팀을 지도하는 나로선 아무리 대통령의 아들이라고 해도 개인지도를 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완곡하게 제의를 거절했다.

그 뒤 농구협회에서 추천한 코치가 지만을 가르쳤다는 얘기를 들었다. 청와대 한쪽에 농구 코트가 만들어지고 골대가 세워졌음은 물론이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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