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익숙한 것과의 이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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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포항제철 조강 (粗鋼) 규모 2천8백t으로 세계1위, 조선 (造船) 수주량 일본 누르고 세계 1위, 93년말 현재 연간 2백5만대 자동차 생산, 세계 10대 석유소비국, 원전이용률 세계 2위.설비능력 세계 10위, 항공여객수송 세계 12위.화물수송 세계 5위, 세계 8위의 출판대국, 채소.꽃 재배면적 세계 2위, 증권시장 상장회사수 세계 13위, 반도체 메모리분야 세계 1위, 특허출원 인구비율로 세계 2위, 세계 8위의 통신선진국, 영화시장 세계 7위…. 어느 월간지 1995년도 신년호 부록 '한국인의 성적표' 다.

영락없는 우등생의 성적이다.

'부자클럽'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 가입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외형상의 수치에 근거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 (IMF) 구제금융 이후 한국경제의 위기를 가장 본격적으로 분석한 매킨지보고서는 "한국의 경제성장은 가치파괴의 과정이었다" 고 단언했다.

코흘리개 저금통까지 깨 모은 국내자본과 막대한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대대적으로 투자한 제조업에서 자본수익률은 지난 15년간 금융비용을 밑돌았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이 보고서의 결론은 한국에서 "경영은 없다" 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사회의 위기는 바로 뿌리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국인이 만들어 낸 자료와 통계는 국제사회에서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회사의 회계장부가 분식 (粉飾) 결산 투성이고 정부가 제공하는 자료는 주먹구구였다.

노동부가 발표한 97년 재해율 0.81%는 정작 노동부 간부도 믿지 않는 통계였다.

94년 범죄통계에서 일본의 범인검거율은 43%, 한국은 88.3%로 나타났다.

문제는 '귀신 잡는' 한국수사기관의 범인검거율이 허구라고 판단해 이 데이터를 일본의 범죄백서에서 지워 버렸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질병통계에서 남성의 질병 종류 가운데 자궁암 항목이 들어 있었다는 웃지 못할 사례도 있다.

통계가 이 지경이니 그것을 기초로 만들어지는 정책이 제대로 세워질 리 없고 예산낭비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있는지 둘러보라. 기업.금융.정치.교육.국방.사법.언론.학문 그 어느 한 곳인들 온전한 곳이 있는가.

말 못하는 삼풍아파트가, 성수대교가 그토록 이 사회의 위기를 말해 주고 있었건만 그 어느 누구도 이 참혹한 국가붕괴를 예측하고 분석하고 경고하지 못했다.

무능과 부패와 자만의 구조가 우리를 휩싸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병무비리가 터져 나오는가 하면 부유층의 재산해외도피 대책이 마련된다는 보도가 있다.

국가의 근간이라 할 법질서와 도덕규범이 해체된 상황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너진 사회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서까래는 썩어 무너지고 온 지붕에 물이 새고 있다.

한두 개의 기둥을 바꾸거나 양동이 몇 개로 집을 고치고 비를 막을 단계는 이미 지났다.

무너진 사회 바로 세워야 "격변의 시기에, 그리하여 과거의 패러다임이 깨지고 있는 혼돈의 시기에, 과거의 산물 위에 다른 더 나은 것을 쌓아 올려 가는 누적주의는 잘못을 더해 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쓰레기통을 대량으로 사들여, 집을 더욱 비좁고 더럽게 만드는 것과 같다.

" 최근 IMF시대에 개혁의 이론과 방법을 설득력 있게 제시함으로써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구본형의 '익숙한 것과의 이별' 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방미 (訪美)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일성이 "정치.경제.사회의 총체적 개혁" 이었다.

도탄에 빠진 국민이 열망해 마지않던 목소리였다.

많은 공약이 실종되고 뭐 하나 제대로 바뀌는 것이 없다는 불평이 커 가기만 하던 시기에 나온 단비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쓰레기통을 많이 사들이는 일' 이 아닌지는 두고 볼 일이다.

박원순<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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