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회장 소몰이 방북 이모저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50년 분단된 한반도의 허리를 '소떼' 가 이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5백마리의 소떼가 냉전과 대립의 상징인 판문점 안 군사분계선을 넘어서는 순간 남과 북은 모처럼 마음의 벽을 허물고 동포임을 실감했다.

서산에서 판문점까지 2백61㎞. 소떼의 장정에 환송나온 시민들은 '화합의 전령' 에 분단의 한과 통일의 염원을 실어 북쪽에 띄웠다.

○…16일 오전8시쯤 임진각 바로 위에 있는 통일대교 앞에서 간단한 환송행사를 가진 鄭명예회장은 8시20분쯤 갓 개통한 통일대교를 건너 판문점으로 향했다.

鄭명예회장이 탄 현대 다이너스티 승용차를 선두로 북한 방문단이 탄 버스와 소떼를 실은 트럭 50대가 뒤를 이어 9백m 다리를 완전히 메웠다.

방북단은 연도에 나온 주민.군인.미군의 환호를 받으며 9시쯤 판문점에 도착, 남측 평화의 집 귀빈실로 들어갔다.

소떼는 9시6분쯤 군사분계선에 도착, 15분 만에 모두 통과. 박병대 남측 단장은 임순일 북측 단장에게 "소를 빨리 키워 새끼를 많이 낳아 식구가 늘어나기를 바란다" 고 덕담 (德談) 을 건내자 임단장은 "잘 키우겠다" 고 화답.

"빚갚으러 歸鄕" 감회

○…15분간 휴식을 취한 鄭명예회장은 9시15분쯤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기자들의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하는 등 비교적 건강한 모습. 그는 인사말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청운의 꿈을 안고 아버님의 소 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다.

이제 그 한마리 소가 1천마리가 되어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가는 것" 이라며 감회어린 표정. 회견을 마친 鄭명예회장 일행은 9시50분쯤 귀빈실을 나와 소떼를 북측에 인도하고 돌아온 운전기사 50명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중립국감독위 회의실에 9시55분쯤 도착. 그는 얼굴에 시종 환한 웃음을 머금고 손을 흔들면서 "잘 다녀오겠다" 고 답례. 鄭명예회장은 오전10시 정각 중감위 회의실을 반으로 가르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땅을 디뎠다.

○…북측에선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을 비롯, 20여명의 환영객이 나와 중립국감독위 회의실 북측 출입구 앞에서 鄭명예회장 일행을 맞았다.

송부위원장은 반가운 표정으로 "鄭선생이 오신 것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며 인사했고, 이어 북측 여성이 鄭명예회장에게 꽃다발을 건네기도. 한편 북측은 소떼를 싣고 온 트럭기사들에게 백두산 들쭉술 1병과 인삼곡주 1병, 려과담배 1보루 등 '귀한 선물' 을 줬다.

판문점 = 공동취재단

失鄕民들 대거 몰려

○…鄭명예회장의 판문점 도착에 앞서 현대측이 통일대교 5백m 앞 도로상에 마련한 방북 환송 행사장엔 이른 아침부터 실향민.취재진과 구경인파.현대 관계자 등 1천여명이 몰려 북새통. 실향민 교인단체인 '평양노회 장로회' 회원 10여명은 '정주영회장 가시는 길 통일의 길' '소몰고 방북, 통일 물꼬'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나와 고향방문에 대한 기대를 표시. 조계종 윤일선 (67) 스님은 오전6시20분쯤 소떼가 도착하자 트럭을 일일이 들르며 소의 무사 북송을 기원해 주기도 했다.

○…鄭명예회장은 이에 앞서 오전6시10분쯤 회색 중절모와 바바리코트 차림으로 서울청운동 자택을 나섰다.

그는 "좋은 꿈 꿨느냐" 는 기자들에게 "돼지 꿈을 꿨다" 고 농담을 건네기도. 6시25분쯤 현대 본사에 도착, 평소 습관대로 간단한 이발을 한 후 가족들과 방북길에 올랐다.

○…이번 소떼 북송길엔 운전기사 86명, 목부 14명, 행사준비요원 50명 등 2백30여명의 인원이 동원됐다.

북송 트럭의 경유 소비량만도 두차례에 걸쳐 약 2만ℓ, 1천만원어치에 달했다.

이재훈.양선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