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쌀이어폰·무선진동기 … 토익 커닝의 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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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5월 31일은 197회 토익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인 A씨(25·여)는 이날 집을 나서기 전 쌀알 반 톨 크기의 은색 물건을 양쪽 귀 속에 넣었다. 무선 자기장 이어폰이었다. 목걸이 모양의 안테나를 목에 걸고, 작은 수신기도 허리춤에 찼다. 안테나와 수신기를 감추기 위해 헐렁한 옷을 입은 A씨는 서울의 한 고사장으로 향했다. 오전 10시, 시험이 시작됐다. 얼마 후 이어폰에서 정답이 들려왔다. “1번은 a, 2번은 c….”

정답은 A씨가 시험을 보고 있던 고사장 인근에 주차된 승용차에서 송신되고 있었다. 김모(42)씨가 차 안에 앉아 송신기에 입을 대고 답을 불렀다. 김씨는 어떻게 정답을 알 수 있었을까.

비밀은 김씨가 들고 있는 무선진동기에 있었다. 진동기는 같은 고사장에 들어간 박모(31)씨가 손안에 숨긴 차량 무선키 모양의 무선기기 ‘차임벨’과 연결돼 있었다. 박씨는 문제를 풀면서 엄지손가락으로 버튼을 눌렀다. 정답이 a이면 한 번, b이면 두 번 누르는 식이었다. 김씨는 무선진동기가 진동하는 횟수에 따라 정답을 적었다. 이러한 ‘3각 교신’ 과정을 거쳐 200점대이던 A씨의 토익 성적은 300점 넘게 올라 500점대가 됐다.


A씨가 김씨를 알게 된 것은 시험을 치르기 20여 일 전이었다. 인터넷의 토익 응시자 카페에 김씨가 올린 ‘고득점 보장’이란 글을 봤던 것. A씨가 댓글을 달자 김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김씨는 A씨에게 가족 중에 경찰이 있는지 물은 뒤 부정행위 방법을 소개했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답을 전송받는 방법과 무선 자기장 이어폰을 이용해 답을 직접 듣는 방법이 있었다. 가격은 각각 200만원, 300만원대였다. 이씨는 보다 안전해 보이는 이어폰 방식을 택했고, 시험 전날 김씨를 만나 장비를 건네받았다. 시험이 끝난 뒤 A씨는 김씨가 알려준 계좌로 330만원을 송금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23일 토익 응시자 28명으로부터 5000만원가량을 받고 부정행위를 한 혐의(업무방해)로 김씨와 박씨를 구속했다. 또 부정 응시자 28명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이들 대부분은 대학생과 취업준비생이었다.

2007년 강원도 원주교도소에서 박씨를 만난 김씨는 박씨가 4살 때부터 미국에 살았으며 영어 강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토익 응시자에게 정답을 알려주고 돈을 벌자”고 제안했다.

이미 토익 부정 응시 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김씨는 박씨에게 노하우를 전수했다. 출소 후 토익 최고 성적이 950점인 박씨는 시험을 직접 보며 정답을 골라내는 ‘선수’로, 김씨는 손님을 모으고 정답을 알려주는 ‘총책’으로 역할을 나눈 뒤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통해 정답을 알려주는 방식을 애용했다. 특별한 장비 없이도 부정행위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응시자들에게 휴대전화를 숨기는 방법도 알려줬다. 팔뚝 안쪽에 휴대전화를 고정시킨 다음 긴소매 옷을 입고 휴대전화가 있는 자리만 구멍을 뚫도록 했다.

경찰 관계자는 “김씨는 대포폰과 대포통장을 이용해 거래했으며 피시방을 돌아다니며 인터넷에 글을 올려 IP 추적을 피하는 치밀함을 보였다”며 “토익위원회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마지막 열 문제는 답을 알려주지 않고 응시자가 직접 풀도록 했다”고 말했다.

 정선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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