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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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물론 봉환은 얼추 의식이 돌아온 상태였지만, 그들의 정체를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지나온 기억을 총동원해보았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내는 더욱 음습한 장소를 찾아 봉환을 잡아끌었다.

버려진 어망들 뒤에는 건축 폐자재들이 너절하게 쌓여 있었다.

사내는 주위를 살핀 끝에 가로등을 등지고 있는 그 장소에서 봉환을 꿇어앉혔다.

느릿느릿 뒤따르는 다른 사내는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러나 뒷짐을 진 손에는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몽둥이 한 끝이 땅에 끌리고 있는 소리가 호비칼로 애간장을 도려내는 듯 파고들었다.

새로운 위기가 닥친 것은 확실했지만, 뒷결박이 지워진 상태였기 때문에 옴치고 뛸 재간이 없었다.

그런데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것이 틀림없는 이들의 테러는 어째서 입을 틀어막을 작정은 않는 것일까. 살려달라는 외마디 소리 따위는 두려울 게 없다는 뜻일까. 아니면 어떤 자백을 받아낼 심산일까. "너 활어 용달트럭 몰고다니던 촌놈 박봉환이 맞지?" 얻어맞은 왼쪽 잔허리께가 끊어질 듯 우려왔다.

그러나 봉환은 어금니를 지그시 사려 물었다.

입을 열면 살려달라는 외마디 소리가 저절로 쏟아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네가 깡 있고 배짱 가진 놈이란 건 알고 있어. 이번엔 어디까지 견디나 한번 볼까?" 둔탁한 소리가 난 것과 때를 같이해 등줄기를 칼로 찢는 것처럼 화끈했다.

연거푸 다섯번. 그러나 느닷없이 뭉둥이질이 멈추었다.

봉환의 이름을 정확하게 맞혔던 사내는 두어 발짝 뒤로 물러나 다시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멀리 있는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있는 두 사내의 껑충한 키꼴은 정수리를 싹둑 자른 것처럼 가지런했다.

"요사인 한씨네 행중이다 뭐다 하면서 해변도시 오일장을 돌면서 명태장수하고 있다지? 그래 잘 팔려? 잘 팔린다는 명태장수로 살면 됐지. 엉뚱한 짓거리는 왜 저지르고 다녀?" 봉환은 드디어 테러를 당하고만 있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상대자를 자신을 잘못 선택했거나 아니라면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기 때문이었다.

가차없는 몰매를 맞아 병신되고 나면, 불량배들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강단이 무슨 소용이며, 사내다운 것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비로소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누구나 곤경에 빠지면, 자기변명의 명분을 찾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때 벌써 이마는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가 꺾여 있었고, 목은 메고 혀는 굳어가고 있었다.

외마디 소리조차 내쏟을 기력까지 깡그리 소진된 상태였다.

매를 맞을 때마다 본능적인 방어자세를 취했었는데도 더 이상 버틸만한 기력은 없었다.

신체의 어떤 부위에서 살점이 찢겨나가거나 피가 흘러나오는 곳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오랜 경력을 쌓은 테러의 명수들임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흥분하는 법이 없었고, 단 한차례의 매질도 조준했던 급소에서 빗나간 적이 없었다.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는 허튼말 한마디조차 흘린 적이 없었다.

그들의 테러는 처음과 끝이 자로 잰 듯 정확했다.

몇 차례의 뭉둥이질을 연거푸 내려치고난 뒤 묻곤 했던 한 두마디의 질문들은 새겨보면, 아무런 내용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감정의 기복이 전혀 엿보이지 않는 차분한 질문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던졌던 것은 봉환이가 기절을 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는 속셈이었다.

은밀한 가운데서도 잔인하기 짝이 없었던 테러는 그랬기 때문에 시간을 오래 끌진 않았다.

먼데 불빛이 시선에서 아물아물 사라지려는 찰나, 그들은 드디어 매질을 멈추었다.

구타가 있었다는 흔적은 물론 땅바닥에 핏방울 한 점 흘린 자국도 없었던 전문적이고 완벽한 테러였다.

자신들이 몰고 왔던 승용차로 돌아가기 직전 그들은 딱 한 마디를 봉환에게 남겼다.

"너의 패거리들 중에 한철규라고 있지? 네가 오늘 구타를 당한 것은 바로 그놈 때문이야. 그러니까, 복수하고 싶거든 그놈에게 쇠파이프를 휘둘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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