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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병 속엔 부처에 바친 정갈한 물, 그리고 정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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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고려인들이 몸에 지니고 다니던 양류관음보살상.

부처나 보살에게 바치는 맑은 물을 담는 물병으로 쓰이던 정병(淨甁). 불교가 성행했던 고려시대에는 다양한 재질로 만든 정병이 널리 쓰였다. 여느 물병과 달리 물을 담는 주구(注口)와 물을 따르는 첨대(尖臺)로 이루어진 독특한 모양은 미학적으로도 눈길을 끈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은 소장 정병 중 걸작만 10여 점 엄선한 테마전 ‘정병과 관음신앙’을 23일부터 10월11일까지 미술관Ⅱ 백자실에서 연다.

고려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물가풍경 무늬정병’(국보 92호), ‘청자 물가풍경 무늬 정병’ (보물 344호) 등 정병의 대표작들이 나온다. 신안에서 발굴된 정병도 전시된다. 박물관측은 “신안 정병은 그동안 은제로 알려져 있었으나, 분석 결과 주석과 납의 합금임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에선 비슷한 시기에 제작됐으나 청동·주석·청자 등 재질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른 정병들을 한 눈에 보여주는 셈이다. 똑같이 청동으로 만들었다 해도 녹의 성분에 따라 그 빛깔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높이가 2.6㎝에 불과한 이 금불상의 오른손 언저리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정병이 놓여있다. 정병이 관음 신앙에 수용된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국보 92호 ‘물가풍경 무늬 정병’(고려 12세기, 높이 37.5㎝·아래 사진左)은 청동으로 만들었다. 주구 뚜껑 부분, 첨대와 목 사이 원반의 투각 장식은 은으로 된 것에 금을 씌웠다. 금도금은 벗겨져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청자 물가풍경 무늬 정병’(보물 344호, 고려 12세기, 높이 34.2㎝·아래사진右)은 양각 기법으로 무늬를 새겨넣었다. 문양의 옆부분을 파내 무늬가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기법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정병과 함께 전시되는 ‘금제 관음보살상’도 눈길을 끈다. 2.6㎝ 크기의 조그마한 고려시대 보살상의 오른손 쪽에 버드나무 가지를 꽂은 정병이 있다. 정병은 원래 인도의 승려가 마실 물을 담던 수행 도구였다. 5C 초 『청관세음경』이 중국에 알려지면서 정병은 불교의 의식구로 쓰이게 된다. 청관세음경에는 관음보살이 버드나무가지와 맑은 물을 중생에게 받은 뒤 그들의 병을 치료해줬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정병과 버드나무가지를 든 모습은 양류관음보살의 전형적인 도상이다.

고려 정병에 묘사된 ‘포류수금문(蒲柳水禽文)’을 확대한 그림도 전시한다. 포류수금문은 버드나무가지가 늘어진 물가에서 배를 타는 사람과 새 등을 묘사한 서정적인 문양이다. 금속제 정병에는 대개 문양이 없지만 포류수금문을 입사(음각으로 파낸 뒤 다른 재료를 홈에 채워넣어 표현하는 기법)로 표현한 것들이 여러 점 있다. 청자 정병과 대접, 금속제 향완에도 쓰이는 등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한 문양이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나타나지 않는 고려만의 특징이다. 서긍의 『고려도경』에선 귀족과 관리, 사찰과 민가에서 물을 담을 때 모두 정병을 사용했다고 전한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채해정 학예연구사는 “고려의 정병은 유물이 워낙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생활용품으로 이용된 것이 맞는 듯하다”고 설명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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