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30. 태릉선수촌 생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한국선수단 결단식에서 김택수 체육회장(左)이 신동관 단장에게 태극기를 건네주고 있다.

내가 농구선수 때 국가대표팀은 서울 동숭동에 있는 합숙소에서 훈련했다. 그런데 1964년 도쿄 올림픽에 갔다온 민관식 체육회장이 태릉선수촌을 만들었다. 66년 대표팀 지도자가 된 뒤부터는 이곳에서 숙식하며 훈련했다.

태릉선수촌은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여러 가지 규제를 만들어 운동에만 전념하도록 했다. 술을 마시는 것은 엄격하게 통제됐고, 외출도 쉽지 않았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초기엔 복지시설이 거의 없었다. 오후 훈련이 끝나고 밤이 되면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었다.

나는 당시 미국에서 출판된 성인 에로소설을 원서로 탐독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송영수 복싱감독, 김자헌 사이클감독을 비롯해 예닐곱명의 코치가 내 방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방금 읽은 소설의 내용을 번역해 들려줬다.

그들은 귀를 기울이다 짜릿한 대목이 나오면 숨을 죽이며 얼굴을 붉혔다. 내가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빨리 진도 나가자"며 재촉했다. 덕분에 나는 '진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택수 체육회장 시절이었다. 경남고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했던 김 회장은 태릉선수촌으로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특히 일요일 오후엔 나와 함께 정문 앞에 앉아 외출하고 돌아오는 선수들을 지켜봤다. 선수들은 대부분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정문에 들어서곤 했다. 모처럼 밖에 나갔으니 해방감에 들떠 선수촌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술을 마신 것이다. 특히 축구.농구선수들은 대표적인 주당이었다.

김 회장은 "저 녀석 봐. 틀림없이 술 마셨지"라면서도 선수들에게 애정 어린 눈길을 보냈다.

이런 기억도 있다. 오전 6시면 기상시간을 알리는 승리의 노래 소리가 선수들의 단잠을 깨웠다. 그런데 어느 날 신기하게도 조용했다. 노래 소리가 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대부분의 선수는 모처럼 단잠을 잤고, 습관적으로 6시에 눈을 뜬 선수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선수촌 관리부서에선 난리가 났다. 조사해보니 범인(?)은 '선수촌 악동' 인 역도의 황호동 선수였다. 황 선수가 전날 밤 스피커에 연결돼 있는 전선을 모두 끊어버린 것이다.

그 무렵엔 급식도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농구선수들은 외제 초콜릿이나 주스를 맘껏 먹을 수 있는 특혜(?)를 누렸다. 69년 농구대표팀 감독은 박상영씨였다. 당시 감독은 선수를 직접 지도하기보다 선수 관리나 행정적인 지원을 담당했다. 훈련은 코치의 몫이었다. 검찰청에서 세관 담당으로 근무하던 박 감독은 태릉선수촌에 올 때마다 압수한 밀수품 중에서 먹을거리를 한 보따리 싸들고 왔다. 요즘 같으면 문제가 될 일이었지만 당시 농구선수들은 그 덕분에 다른 종목 선수들의 부러움 속에서 종종 회식을 즐기곤 했다.

나는 태릉선수촌에 있을 때 선수들에게 농구 대신 미식축구를 훈련하게 해 태릉의 식구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적도 있다. 큰 경기를 앞두고 대표팀이 소집되면 첫 일주일은 몸 만들기와 함께 미식축구를 하게 했다.

물론 정식 미식축구는 아니었고 농구공으로 하는 미식축구였다. 농구공을 잡고 뛰고 막고 밀치는 선수들의 모습이 위험해 보이긴 했지만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고 생각한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