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표결처리 약속 뒤집은 민주당, 공당 맞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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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국회가 갈수록 실망스럽다. 대통령 사과 등을 요구하며 길거리로 나선 민주당이 석 달 전에 한 법안 처리 약속까지 파기하겠다고 한다. 민주당 이강래 원내대표는 18일 “미디어 관련법 합의사항은 전제조건인 여론수렴이 한나라당에 의해 좌절됐기 때문에 전면 무효, 백지화됐음을 선언한다”고 말했다. 어제는 김형오 국회의장이 여야 원내대표를 부른 자리에서도 여야의 입장 차이만 확인했다.

3월 2일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와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미디어법에 대해 의견 수렴 절차를 좀 더 거친 뒤 6월 임시국회에서 표결처리하자고 합의했다. 문제가 된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는 바로 그 합의에 따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의 자문기구로 만들어졌다. 여야에서 각 10명씩 추천해 100일간 활동한 뒤 보고서를 내도록 했다. 그런데 활동 시한 막바지인 지난 17일 민주당 측 추천 위원들이 갑자기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여론조사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이 민주 원내대표는 이 결과를 받아 약속을 깨버렸다.

미디어위원회가 여론수렴을 못했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동안 18차례나 전체회의를 열었다. 서울과 지방에서 7번에 걸쳐 공청회도 열었다. 물론 출범 초 걱정대로 위원들이 양편으로 갈라져 공방만 벌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미디어위원회가 수렴한 여론은 국회 활동을 돕기 위한 하나의 참고자료일 뿐이다. 입법 여부나 입법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국회의원들이지 자문위원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위원들 사이에서조차 의견이 크게 엇갈린 한 가지 사안을 이유로 보고서 작성마저 거부한 것은 자기 역할을 망각한 행동이다.

더군다나 여론조사로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지방 공청회에 참석자가 적었던 데서도 드러났지만 전문적인 미디어정책에 대해 일반 국민의 이해와 관심은 매우 제한적이다. 이런 전문적인 분야의 정책을 여론조사로 결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여론조사로 결정할 것이라면 전문가들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할 이유가 없었다. 또 정당은 왜 있고, 국회와 국회의원의 역할은 무엇인가. 여론조사가 유일한 여론수렴 방식인 것처럼 몰아가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문제가 된 여론조사는 특정한 방향으로 답변을 유도한다고 위원회 내부에서도 논란을 벌이지 않았는가.

이를 핑계로 약속을 파기한 민주당의 태도는 더 문제다. 이강래 원내대표도 미디어환경의 변화에 맞춘 법개정의 필요성은 인정해 왔다. 그런데도 공당의 대표가 한 약속을 뒤집고, 오히려 등원 거부의 구실로 삼아 국회에서 논의할 기회마저 포기해서야 어떻게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겠는가. 자문기구에서 원하는 방향의 여론조사를 못했다는 것은 약속을 파기하는 이유가 되기엔 너무 궁색하다. 그렇게 중요하면 자문기구에 맡길 게 아니라 직접 해보면 될 일이다. 아예 국회에 대못을 박고 거리로 나설 작정이 아니라면 빨리 국회로 돌아가기 바란다. 그것이 10년간의 집권 경험까지 있는 제1야당으로서 책임 있는 처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