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과 국내 문화계]'잔인한 6월'피해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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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6월엔 큰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전세계인이 월드컵 경기를 시청하며 동시에 발을 동동 구를 것이기 때문. 하지만 이러한 농담 차원이 아니라 월드컵철을 맞아 실제로 땅이 꺼지는 것을 느낄 사람들도 있다.

바로 각종 문화행사나 문화상품을 준비중인 사람들. IMF 구제금융 시대에 들어서면서 가뜩이나 문화 소비가 대폭 준 상황에서 전국민의 관심을 쓸어갈 월드컵철에 자칫 물건을 내놨다간 커다란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선택은 두가지. 피하느냐, 맞서느냐…. 당연하게도 일단 피하고 보자는 쪽이 다수다.

◇ 피하는 다수 = 가요계에는 '6월에 음반을 내는 것은 자살이다' 는 인식이 팽배해있다.

음반 발매후 2~3개월안에 승부를 내야하는 가요 풍토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서울음반은 주력 기획상품인 편집음반 '핫 클립' 의 발매시기를 최대한 앞당겨 이달 초 시장에 내놓았다.

소호대와 김종서의 발라드 음반은 월드컵 이후로 발매계획을 미뤘다.

도레미 음반도 최재훈의 신보는 제작을 재촉해 5월말 발매한 반면 제작을 거의 끝낸 신효범의 경우에는 7월쯤에나 음반을 발매할 계획이다.

영화쪽도 마찬가지. 월드컵 기간중인 13.20일 개봉하는 작품은 '로키호러 픽처쇼' '도니 브래스코' 등 매니어 취향의 영화. 블록버스터 영화는 이 기간을 피해간다.

'딥 임팩트' 는 5월16일로 개봉을 앞당겼고 '고질라' 와 '아마겟돈' 은 대회가 종반을 치닫는 각각 27일, 7월4일 내걸 예정이다.

공연도 사정은 비슷하다.

11~21일 공연을 갖는 리아의 경우 2개월 전에 극장을 잡는 관행에 따라 일정을 잡아놓긴 했지만 토요일인 13일과 일요일인 21일 각각 한국의 경기가 있어 헐렁한 객석을 각오해야 할 전망. 주말 관객이 평일보다 2배 이상 많아 더 울상이다.

12~18일 공연을 잡아놓은 윤도현 등도 비슷한 입장이다.

한 매니저는 "얼마간 위약금을 물고라도 미루고 싶은 심정" 이라고 털어놓는다.

월드컵이라는 불똥은 비디오 대여업계에도 튈 전망. 주말등 밤 시간을 이용해 편안한 마음으로 비디오를 빌려볼 고객들이 심야시간대의 경기 중계나 하이라이트에 몰두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 이용하는 소수 = 13일 '모스트 원티드' 라는 영화의 시사회를 개최하는 PC통신업체 하이텔과 영화기획사 프레임25는 영화 상영후 관객들과 함께 대형스크린을 통해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를 함께 보는 이벤트를 계획중이다.

홍대앞 인디밴드들도 뉴스전광판을 통해 경기를 관전하는 '붉은악마' 들을 상대로 경기 시작전 거리공연을 갖고 자신을 홍보한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월드컵 관련 음반을 발매하는 음반사도 축구 열기가 오래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월드컵 공식 주제가인 '인생의 컵' 을 담은 음반 '알레 올라 올레' 가 이미 발매됐고 '오레오레오레…' 라는 가사로 유명한 '올레올레 더 월드' 를 담은 음반과 스페인과 독일의 월드컵 공식 주제가 '파리의 카니발' 이 담긴 '풋볼 피버' 등도 발매를 서두르고 있다.

이들은 축구 열기가 한반도를 달궈주길 바라고 있다.

이쯤 되면 '도대체 월드컵이 뭐길래…' 하는 생각이 든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한 글에서 "스포츠 관람을 둘러싼 논쟁은 정치논쟁을 대체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 이라고 꼬집는다.

결국 스포츠도 좋지만 자칫하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망각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우리 대표팀의 16강 진출도 좋지만 문화적으로 즐길 건 즐겨줘야 우리 문화의 생명도 유지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문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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