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다 만 예술인회관 화가들 '점거' 둥지 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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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치된 예술인회관 앞에서 김윤환(左)·김현숙시가 지게차에 탄 채 행위예술을 벌이고 있다.

"비바람 부는 황량한 곳에 5년 세월을 너 혼자 서 있게 해 미안하다. 지금에서야 너의 목소리를 들었다. 늦지 않았기를 바란다. 너도, 우리 미술인도, 시민도 모두 행복하게 하나가 되려 한다."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지난 17일 서울 목동 예술인회관 앞. 짓다 만 우중충한 건물을 향해 올라간 지게차 머리 부분에 탄 작가 김현숙(34)씨가 편지를 읽어내리자 함께 탄 김윤환(39)씨는 비눗방울을 불어 하늘로 날렸다. 콘크리트 마무리만 한 채 5년 동안 버려져 있던 예술인회관에 모처럼 사람 훈김이 돌았다. 두 김씨가 기획한 '오아시스 프로젝트'를 지켜보는 미술가 80여명이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판 '점거 아틀리에(스쾃)'의 막이 오른 순간이었다.

이날 행사는 8월 15일로 예정된 본격적인 '점거'를 앞둔 예비 축제에 해당한다. 참여한 미술가들은 각기 자신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행위예술을 펼쳤다.

비옷이나 티셔츠에 그림을 그린 화가, 우산에 메시지를 적고 잘라낸 조각가 등 톡톡 튀는 발상의 작품이 즉석에서 발표됐다. 이들 말고도 340여명이 목동 예술인회관을 점거해 작업실로 쓰겠다고 이미 분양 신청을 냈다. 김윤환씨는 "미술가 80%, 다른 장르의 예술가 20%로 섞어 모두 500명이 머물 수 있는 점거 아틀리에를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자신이 머물 건물 층수를 정하는 순서로, 잔칫집처럼 박수와 웃음이 터져나왔다. 뺑뺑이를 돌려 화살 날리기로 층수를 받는 추첨놀이 자체가 또 하나의 행위예술이었다. 한편에서 김현숙씨는 "수도와 전기 기초 공사는 돼 있지만 칸막이를 해야 하고 20층짜리 고층건물이라 중고 엘리베이터라도 마련해야 할 텐데…"라고 걱정했다.

'오아시스 프로젝트'는'한국 사회에서 과연 예술 점거 행위가 가능할 것인가'란 물음 외에 또 하나 묵직한 사회 문제를 던졌다. 건물 자체가 단순히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이사장 이성림)가 예술인을 위한 공간으로 정부 지원 220억원을 받아 짓고 있는 예술인회관이 어디로 가야 할까를 푸는 실마리를 내비쳤다는 평가다. 착공 7년이 넘도록 시공회사 선정 등에 얽힌 잡음으로 공중에 떠 버린 건물을 빨리 예술인들 손에 돌려주자는 독촉인 셈이다.

김윤환씨는 "예총이 최근 문화부 요청으로 실시한 감사원의 감사 결과 관리와 감리비 정산 등이 부적정했다는 지적을 받았다"며 "대책위원회를 꾸려 사업을 투명하게 재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사이스 프로젝트'가 작업실 마련에 목마른 예술가에게 단비가 될 수 있을까, 잡음으로 얼룩진 목동 예술인회관을 씻어내릴 신선한 샘물이 될 수 있을까, 점거 예정일인 8월 15일이 다가온다.

정재숙 기자

['점거 아틀리에'란] 비어있는 건물에 들어가 살면서 예술활동을 펼치는 '스쾃

비어있는 건물에 들어가 살면서 예술활동을 펼치는 '스쾃(squat)'은 역사가 길다. 1835년 오스트리아 목동이 기름진 남의 초지에 들어가 양에게 풀을 뜯기던 관습이 유래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도심으로 이주한 노동자가 잘 곳을 구하다 귀족 소유의 빈 집을 차지해 사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도시 하층민 사이에서 차츰 계급적 각성이 일면서 '68혁명'에 이르면 기존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을 찾는 젊은이들이 빈 터에 이룬 작은 사회를 '스쾃'이라 불렀다. 1990년대에 자유롭고 꿈꿀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가난한 예술가가 빈 건물을 점거해 작업실로 쓰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스쾃'은 이제 '점거 아틀리에'를 일컫는 말로 통한다. 프랑스 파리 중심가인 1구 리볼리가 59번지에 있는 '로베르네 집'(사진)은 이름난 점거 아틀리에로, 99년 25명의 예술가가 점거해 작업실로 쓰기 시작했다. 당시 파리시는 중앙정부 소유이던 이 건물을 사들여 예술가들에게 임대해주는 아량을 베풀었고, 지금은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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