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덕의 13억 경제학] ‘원저우 깍두기’들의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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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주요 도시는 나름대로 철학이 있습니다. 베이징은 정치의 도시라고 하고, 상하이는 비즈니스 도시라고 합니다. 칼럼 '성(城)과 탄(灘)의 도시'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광저우는 상(商)의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업, 무역의 철학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각 도시는 그 특성에 맞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어울리며 살아가고, 그래서 더욱 도시의 색깔이 뚜렷해 집니다.

원저우 얘기를 할까 합니다. 얻그제 저희 신문에 쓴 칼럼 '원저우부동산투기단'을 보신 많은 독자들께서 '도대체 원저우 사람들이 왜 부동산시장에 큰 손이야?'라고 물어오셨습니다. 이 참에 원저우를 더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옛날 원저우 취재 후 썼던 칼럼을 다시 손질해 올립니다. 혹 '원저우투기단'기사를 보지 못한 분은 여기를 클릭하시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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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저우 사람들이라고 특별히 다를 게 있겠는가? 다같은 중국인일진데... 그런데 취재차 들린 원저우에서 그들의 특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머리칼이다. 모두 짧았다. 스포츠 형 머리다. 흔히 조폭 ‘깍두기’ 두발이라고도 한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도, 호텔에서 만난 사람도, 상가에서 만난 가게 주인도 모두 스포츠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머리가 왜 그리 짧을까?

여러 사람에게 ‘너 머리를 그렇게 짧게 깍고 다니냐?’ 고 물었다. 여러 답이 나왔다. 여름에 더워서, 남들이 그리 깎으니까, 돈이 안드니까…. 그런데 공통되는 답이 하나 있다. 바로 ‘하오용러(好用了)’라는 말이다. 우리 말로 옮기면 ‘그게 실용적이잖아’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

‘하오용러(好用了)’.

이 말은 원저우의 도시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원저우는 참으로 실용적인 도시다. 이곳 도시 사람들은 멋도 모르고, 꾸밀 지도 모른다. 오로지 실용, 즉 돈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다.

원저우 사람들은 만나면 돈 얘기를 한다. 그런 점에서는 상하이사람들과 크게 다르지않다. 그러나 말의 속성이 다르다. 원저우 사람들은 '뭘 만들어서 돈 벌까'를 얘기한다. ‘오늘 이탈리아에서 구두 5만 켤레 주문 받았는데, 너네 공장에도 줄까?’ 이런 식이다. 그러면서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구두 샘플을 꺼낸다.

원저우 사람들은 흔히 ‘중국의 유태인’으로 통한다. 그들은 어떤 어려움도 굳건히 이겨내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중국 도시 어디를 가나 원저우 상인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 국내시장뿐만 아니다. 라이터, 안경테, 복장, 문구제품 등은 세계 시장도 장악했다. 시장점유율 70-90%정도를 차지한다. 중국 대륙의 돈과 해외 달러가 지금 원저우로 몰려들고 있다. 어느 덧 원저우는 중국에서도 가장 돈이 많은 도시가 됐다. '원저우가서 돈 자랑하지마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하늘에서 보면 보인다. 원저우시는 뒤 편 3면이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 싸여있다. 그나마 터진 한 면은 바다다. 중국 내 다른 도시와 단절이 된 것이다. 오죽했으면 원저우 말은 너무도 독특해서 중국과 월남이 전쟁할 때 암호로 쓰였단다. 게다가 땅은 좁아 곡식도 풍부하지 않았다. 가난할 수밖에 없다. 무엇인가 해야 했다. 그래서 대륙 다른 도시로 뻗너나갔고, 또 해외로 퍼져나갔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은 원저우인들을 단련시켰다.견디어야 했다. ‘츠쿠나이라오(吃苦耐勞)’, 고생을 마다 않고 일하는 정신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또 손재주가 있었다. 정통적으로 원저우인들이 우산과 신발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는 게 이를 보여준다. 저 멀리 신장우루무치에서 우산장사, 신발수리점을 하고 있던 두 원저우인이 서로 동향임을 알고 부둥켜 울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기도 한다.

1978년 개혁개방이 시작됐다. ‘츠쿠’정신, 그리고 손재주가 맞물려 원저우 깍두기들의 ‘하오용러 주의’가 빛을 발하게 된다.

원저우에 공장이 생기기 시작했다. 가내수공업이었다. 그들은 집 안에 재봉틀을 들여놓고 신발을 만들었고, 또 옷을 만들었다. 일부는 벨트를 만들었고, 또 어떤이는 미니 핸드백을 만들기도 했다. ‘내 비록 닭 머리가 될 지 언정 봉황의 꼬리가 되지 않겠다(寧爲鷄頭,不爲凰尾)’는 원저우인 특유의 창업정신이 발현되면서 원저우 일대에 공장 붐이 일었다. 지금도 원저우 지역에 가면 윗 층에는 주거용 집, 아래 층에는 공장인 건물이 많다. 주상복합이 아닌 주공(住工)복합인 셈이다.

원저우 사람들은 해외 시장에도 진출했다. 원저우 사람들은 해외 제품을 금방 모방해 냈고, 엄청나게 싼 가격에 제품을 수출했다. 라이터가 그랬고, 안경테가 그랬고, 또 구두가 그랬다. 세계로 퍼진 원저우 화교망은 그대로 유통채널이 됐다.

다른 중국지역이 개혁개방, 시장경제에 대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원저우인들은 시장경제에 빠르게 적응했다. 그러기에 덩샤오핑은 ‘원저우를 배우라’고 했다. 원저우 사람들의 비즈니스 형태를 뜻하는 ‘원저우모델(溫州模式)’이라는 말도 나왔다.

중국 대륙과 해외에서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 원저우인들은 그 돈을 은행에 맞기지 않는다. 자기들끼리 사설 은행 만들어 꿔주고 빌린다. '치엔좡(錢庄)'이라 하는 지하금융이다. 그렇게 원저우의 지하에서 흘러다니는 돈이 2008년 말 현재 약 3370억 위안(60조7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다른 도시에 나가있는 투자자금까지 합치면 원저우의 민간자금은 약 6000억위안(108조 원)은 넘을 것이라고 중국 언론은 전하고 있다.

그 돈으로 뭘할까?

투기다. 그들은 중국 전역을 다니면서 돈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고, 팔았다. 그 돈이 상하이로 몰리니까 상하이 부동산가격이 폭등하고, 또 전력난이 심화되면서 석탄 가격이 오르니까 산시(山西)성 탄광 매입에 달려들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부(富)는 시장을 좌지우지할 만큼 막강한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산업자본으로 승화되어야 할 민간자금은 유독 원저우에서는 투기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가난에 찌들어 ‘불쌍한(可怜)' 원저우인들, 그들은 지금 중국경제에서 ‘무서운(可怕)'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원저우 깍두기'들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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