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네사 메이 새앨범 '차이나 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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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문화혁명 (1966~76) 동안 중국에서는 오페라 '홍등 (紅燈)' , 발레음악 '평등한 여성' , 피아노협주곡 '황하 (黃河)' 등 '모범작품' 8곡만 연주가 가능했다. 피아노협주곡 '황하' 와 함께 중국인들이 가장 즐겨 듣는 협주곡이 하나 있다.

바로 바이올린협주곡 '리앙샨보 (梁山伯) 와 주잉타이 (祝英台)' 다. 95교향악축제때 지린성 (吉林省) 교향악단이 서울 무대에서 들려주었던 이 협주곡은 집안의 반대로 이승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한 비련의 두 남녀가 못다한 사랑을 사후 (死後) 세계에서 꽃피운다는 민간설화를 음악화한 작품. 대약진운동 기간에는 중국의 민요 선율에다 서양의 음악기술을 접목시킨 것이 곧 '민족음악' 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59년 당시 상하이음악원 작곡과 학생이던 첸강이 바이올리니스트 헤잔하오의 도움으로 완성한 이 협주곡은 대약진운동이 낳은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중국 전통악극 (樂劇) 의 민요선율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매우 낭만적이고 서사적인 분위기의 음악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 곡이 문화혁명 기간에 금지곡 목록에 오르자 작곡자 첸강은 말러의 교향곡 제4번 2악장을 들으며 아픈 영혼을 달랬다.

평균율로 된 피아노와는 달리 바이올린은 연주자가 음정을 직접 만들어가는 악기. 미분음 (微分音) 을 자유자재로 낼 수 있어 민속음악의 뉘앙스를 내는 데는 적격이다.

문화혁명이 끝난 후 '복권' 된 이 협주곡은 중국의 전통 현악기인 얼후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으로도 널리 연주될 만큼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 친숙한 5음음계인데다 줄거리도 낭만적이어서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바로 그 음악이 싱가포르 태생의 영국 바이올리니스트 바네사 메이 (19) 의 새앨범 '차이나 걸' 에 타이틀곡으로 수록됐다.

여러 사연으로 볼 때 메이가 '리앙샨보와 주잉타이' 협주곡을 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바네사 메이는 '바이올린 플레이어' 를 시장에 내놓은 지 4년만에 무려 3백만장이나 팔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주인공. 새로운 앨범과 함께 단발머리 중국 소녀로 변신했다.

EMI레이블로 발매된 이 음반은 지난 94년 세상을 떠난 그녀의 중국인 외할아버지 탄립키에게 바치는 앨범이기도 하다. 그녀의 몸속에 흐르는 혈통의 뿌리를 찾으려는 작업인 셈이다.

외할아버지가 즐겨 들었다는 이 협주곡을 비롯, 그녀가 직접 편곡한 '투란도트 주제에 의한 환상곡' '해피 밸리 서곡' 등을 담았다. 02-3449-9423. '투란도트' 는 푸치니가 중국을 배경으로 작곡한 오페라이고, 일명 '97 홍콩반환 협주곡' 으로도 불리는 '해피 밸리 서곡' 은 홍콩의 유명한 경마 코스인 해피 밸리에서 열린 홍콩반환 기념공연에서 초연된 바이올린.합창.오케스트라를 위한 곡. 바네사 메이는 현재 이 앨범의 수록곡으로 세 번째 세계 순회공연을 준비중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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