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나는 열두살 소년가장 고단한 삶의 끝은 어딜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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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영화를 시간 때우기용 오락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이 영화를 봐선 안된다. 돈 냄새 물씬 나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좋아한다면 더더욱 이 영화만큼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 영화란 재미 이상의 그 무언가일 수 있다고 믿는다면 한번쯤 도전해볼 만하다. 핍박받는 소수민족인 쿠르드족 출신 이란 감독 바흐만 고바디가 만든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30일 개봉) 얘기다.

이 작품은 노새조차 술에 취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혹독한 추위를 장갑 한 짝 없이 견뎌내는 처절하게 가난한 쿠르드족 다섯 남매 이야기다. 막내를 낳다가 어머니는 죽고, 이 지역 사람들의 거의 유일한 생계수단인 밀수길에 나섰던 아버지마저 지뢰를 밟아 목숨을 잃은 뒤 열두 살 소년 아윱은 동생 네명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된다. 아윱은 자기 입 풀칠도 쉽지 않지만 키가 크지 않는 퇴행성 질병을 앓는 남동생 마디의 치료비를 위해, 그리고 자신은 이미 포기해버린 학교를 다니는 여동생 아마네의 공책을 사주기 위해 힘든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힘에 부치는 날품팔이 일조차 수많은 지원자 가운데 뽑혀야 할 수 있고, 품 안에 공책을 가득 감추고 밀수에 동원되는, 어린 아윱의 고단한 삶을 잔인할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런 아윱의 삶의 무게는 관객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질 만큼 육중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꼭 슬프지만은 않는 것은 아윱 남매의 진한 우애 때문이다. 어른들 눈에는 밥만 축내는 무용지물 마디를 위해 누나는 팔려가다시피 이라크로 시집을 가고, 아윱은 생명을 걸고 국경을 넘는다. 무장강도의 습격을 받아 도망치다 술에 취한 노새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눈밭에 쓰러져 꼼짝도 안할 때 절망적으로 노새의 뺨을 때리는 아윱의 모습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잔상을 남긴다.

아윱과 아마네 등 실제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등장인물들은 모두 현지의 쿠르드족 보통 사람들이다.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이란 예술영화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쿠르드 지역에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를 찍을 당시 조감독으로 일했다. 그러나 참혹한 현실을 아름답게만 그리는 키아로스타미에게 실망해 각본을 써주겠다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직접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감독을 했다. 제53회 칸 영화제 황금 카메라상과 국제 영화평론가협회상 등 3개 부문 수상작이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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