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업 '1인 경영' 힘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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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 PC업체인 델의 창업자이자 회장인 마이클 델(右)은 지난 16일 주주총회에서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케빈 롤린스 사장에게 물려줬다. [텍사스 AP=연합]

미국 산업계에 회장과 최고경영자(CEO)를 분리하는 작업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분식 회계 등으로 얼룩진 엔론 사태 이후 건전한 기업지배구조를 강화하고 경영투명성을 높이려는 주주들의 노력과 기업들의 각성이 변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CEO는 경영사령탑으로서 회사를 전면에서 이끌고, 회장은 이사회 의장으로 경영 감독에 주력함으로써 권력을 분산해 견제 역할을 키우겠다는 의도다.

세계 최대 PC 제조회사인 델의 창업자 마이클 델 회장은 지난 주말 케빈 롤린스 사장에게 CEO직을 공식 이양했다. 델에 합류한 지 8년 된 롤린스는 그동안 회사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델 회장은 지난 3월 새로운 추세에 발맞춰 자발적으로 회장과 CEO를 분리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이에 반해 월트 디즈니의 마이클 아이스너는 지난 봄 주주들의 압박에 밀려 회장 자리를 포기한 경우다. 디즈니 주주들은 3월 초 주주총회에서 아이스너에 43%의 불신임표를 던졌다. 디즈니 이사회는 이런 여론을 받아들여 아이스너에 CEO만 맡기고 신임 회장에 조지 미첼을 선임했다. 아이스너는 20년간 두 자리를 겸직하며 막강한 힘을 행사해 왔다.

미국 최대의 기업용 소프트웨어 회사인 오라클의 래리 앨리슨 회장 겸 CEO도 올 1월 CEO직만 유지한 채 회장직은 내놨다. 제왕적 경영자로 불리며 27년간 오라클을 좌지우지했던 그는 13년간 최고재무책임자(CFO)로 활약한 제프 헨리에 새 회장직을 넘겼다.

시장 및 감독기관 기능을 겸한 뉴욕증권거래소(NYSE)도 지난해 말 이 대열에 동참했다. NYSE는 지난해 9월 리처드 그라소 전 회장이 과다 연봉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물러난 뒤 지배구조를 개선하려고 회장.CEO 분리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올 1월 신임 CEO에 존 테인 골드먼삭스 사장이 부임한 것. 회장직은 그라소 이후 NYSE 개혁을 지휘한 존 리드 임시 회장이 내년 4월까지 더 맡고 있다.

세계 최대의 반도체회사인 인텔은 일찍이 이런 흐름의 본보기가 됐다. 앤드루 그로브 회장은 겸임하던 CEO직을 1998년 크레이그 배럿 현 CEO에 넘겼다.

마이크로 소프트(MS)는 주주가 아니라 정부의 압력으로 분리한 경우다. 2000년 반독점 소송으로 곤욕을 치르던 빌 게이츠 회장은 법무부의 공세를 의식해 CEO직을 스티브 발머에게 넘겼다.

이런 추세의 선구자라면 일찍이 95년 회장과 CEO를 가른 세계 최대 의류업체 갭(GAP)이다.

미국 최대의 온라인 증권사인 찰스슈왑의 창업자 겸 회장인 찰스 R 슈왑도 지난 5월 공동 CEO 자리를 내놓으면서 데이비드 포트럭 사장이 단독 CEO가 됐다.

뉴욕=심상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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