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곳간을 다시 채울 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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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지금 돌이켜보면 눈속임도 그런 눈속임이 없었다. 나라 곳간이 거덜났다던 DJ 얘기다. 1998년 1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 당선자는 “금고가 비었습디다”라며 침통해했다. TV로 중계된 ‘국민과의 대화’에서다. 그는 “금고 열쇠를 넘겨받아 열어 보니 단돈 1000원도 없고 빚 문서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꼴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당시 나라 곳간은 더 없이 튼튼했다. 98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나랏빚은 16.6%.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재정적자 비율이 낮았다. 단지 기업과 은행이 빌린 달러 빚이 많아 나라 전체가 빚쟁이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튼튼한 재정은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했을 많은 일을 가능케 했다. 64조원의 1차 공적자금 조성이 그중 하나다. 64조원은 당시 1년 예산에 맞먹는 금액이었다. 이 돈이 부실 은행을 살리고, 부실 기업을 일으켰다. 수출이 늘고 무역흑자가 커졌다. DJ는 1년 만에 외환위기 극복을 선언할 수 있었다. 곳간이 텅 빈 나라였다면 어림없을 일이었다.

‘텅 빈 곳간’은 DJ에겐 만능 칼과 같았다. 또 하나의 칼이었던 국제통화기금(IMF)과 어울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이 됐다. DJ가 정리해고법 국회 통과 등 ‘IMF 플러스’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다. 언론사 세무조사며, 대우그룹 해체며 과거 같으면 정권을 걸어야 했던 일도 비교적 쉽게 끝났다. 무슨 일이든 ‘IMF와 텅 빈 곳간’이면 무사통과였다. DJ에겐 ‘텅 빈 곳간’이 또 하나의 어젠다이기도 했던 셈이다.

역사적으로 곳간은 위기를 견뎌 내는 힘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곳간만 든든하면 웬만한 경제·사회적 충격은 문제가 안 됐다. 17세기 튤립 투기 광풍을 겪고도 살아남았던 네덜란드가 그랬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튤립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알뿌리 하나는 5500굴덴(약 1억6000만원)에 거래됐다. 몇 년 뒤 이런 광풍이 끝났을 때 암스테르담의 파산자 수는 두 배로 늘었다. 이어 불어닥친 금융위기로 네덜란드는 크게 휘청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세계 무역에서 거둔 큰 성공으로 곳간을 채워놨던 덕이다. 하지만 후폭풍에서마저 완전히 자유롭진 못했다. 국가 부도 위기는 넘겼지만, 강대국 네덜란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곳간은 어떤 권력보다 강하다. 권력이 곳간을 채우지 못하면 곳간은 반드시 권력을 교체했다. 대를 이어서라도. 절대왕정 시기 프랑스가 좋은 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튼튼한 곳간을 믿고 온 유럽 일에 참견했다. 걸핏하면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짐이 곧 국가다라며 오만을 떨었지만, 탈없이 영광 속에 마감했다. 곳간이 받쳐준 덕분이다. 그러나 잔치가 끝나면 누군가는 계산을 해야 한다. 계산은 루이 16세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부했다. 계산은커녕 전임 황제처럼 돈을 펑펑 썼다. 곳간이 거덜났는데도 미국 독립전쟁에 막대한 돈을 지원했다. 결국 프랑스 대혁명이 그를 심판했다.

빈 곳간은 통화 가치도 떨어뜨린다. 미국은 연일 곤두박질하는 달러 값 때문에 체면을 많이 구겼다. 브릭스(브라질·러시아·중국·인도) 국가들은 “불안하다”며 미국 국채를 당장 팔아치울 태세다. 달러 대신 ‘수퍼통화’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도 높이고 있다. 빈 곳간이 죄인지라, 미국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올 연말이면 미국의 재정적자는 약 11조 달러, GDP의 70%를 넘어선다.

이명박 정권도 요즘 곳간 덕을 보고 있다. 28조원의 추경과 약 20조원의 적자 수정 예산, 경제위기 극복에 쏟아 붓고 있는 수십 조의 돈이 다 곳간에서 나왔다. 덕분에 올 1분기 경제가 OECD 국가 중 가장 괜찮을 정도다. 세계 금융위기를 누구보다 잘 견딘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하고 멈춰선 안 된다. 올해만 나랏빚이 58조원 정도 늘어날 전망이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도 35.5%로 높아진다. 아직은 괜찮다지만 외환위기 전에 비하면 두 배가 넘는다. 세수 부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곳간을 다시 채울 준비를 할 때가 왔다는 신호다. 그렇다고 쉽게 세금을 올리는 방법은 금물이다. 되레 세금을 더 낮춰 경제가 더 잘 돌아가게 해야 한다. 한 곳에서 쥐어짜기보다 세금 낼 만한 곳을 늘리는 이른바 ‘박리다매’가 방법이다. 물론 아껴 쓰고, 쓸 데 쓰고, 제대로 쓰는 것은 기본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은 지금도 명언이다. 곳간이 든든해야 복지며 후생이 있다. 요즘 각을 세우며 나라를 들끓게하는 좌·우며 친·반북 갈등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곳간만 든든히 채워놓으면, 최소한 나라 망할 일은 없을 테니.

경제 에디터 jjy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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