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 게릴라들, 웃음 세공하는 장인이 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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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호 03면

KBS-2TV ‘개그콘서트(이하 개콘)’가 14일 500회를 맞는다. 1999년 9월 시작했으니 벌써 만 10년을 채워가고 있다. 그런데 ‘개콘’은 리얼 버라이어티 쇼가 트렌드를 휩쓸고 있는 오락 프로그램 속에서도 당당히 시청률 1위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 현재형의 ‘핫(hot)’ 프로그램이다. ‘무한도전’도, ‘1박2일’도 쉽게 차지하기 힘든 20%대의 시청률을 종종 넘는다. 10년 평균의 시청률은 무려 19.2%(TNS 미디어 코리아 집계)다. 한국 코미디의 새 문을 열어젖힌 개척자였고, 뚝심 있는 전통의 명인으로 자리 잡고서 여전히 우리의 월요병을 달래는 다정한 친구로 곁에 있는 ‘개콘’의 10년은 여러 모로 의미가 깊다.

오늘 500회 맞는 ‘개그 콘서트’

백재현이 대학로에서 시도한 콘서트 형식의 개그 공연을 전유성·김미화가 TV로 도입해 탄생한 개콘은 10년 내내 칭찬과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신선한 시도’와 ‘유치하고 의미 없는 말장난’은 늘 개콘을 동시에 장식하던 어휘였다. 걸핏하면 위기를 말했지만 그럴라치면 틈을 주지 않고 제2, 제3의 전성기가 이어졌다. 아마도 지금은 제7의 위기이자 제8의 전성기이자쯤이 아닐까 싶다.

개콘은 1999년 등장하자마자 금세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공개형 코미디’라는 새로운 시도는 이전 침체에 빠졌던 내러티브 코미디와는 다른 신선함으로 환영받았다. 잘 갖춰진 세트와 거창한 의상, 5분 이상씩 이어졌던 80년대식 코미디에서 벗어나 우주복 같은 간결한 의상으로 통일하고, 1~2분씩 짧게 끊어치고 빠지는 이들은 잰 몸매의 개그 게릴라 같았다. 기승전결의 맥락을 만들어내기 위해 질질 끌지 않고 맥락 없이 하이라이트로 곧장 돌진하는 방식은 스피드의 쾌감을 느끼게 했다. 코너와 코너 사이 음악이 흘러나오며 출연자들의 무대 뒷모습을 보여 주는 연결 화면은 에너지를 쏟아붓는 무대 위의 모습과 강한 대조를 이루며 정서적인 강약을 느끼게 했고, 대본대로 연기하다 반응이 없으면 즉석에서 연기를 바꾸었다.

마지막엔 그날 가장 호응이 컸던 코너를 다시 보여 주는 ‘앙코르 개그’까지 도입했다. 무대 위에서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콘서트형 코미디가 아니면 불가능한 새로운 방식이었다. ‘114 안내원’ 김영철과 ‘사바나의 아침’ 심현섭 등이 빵빵 터지며 개콘은 대번에 주말 최고 인기 프로가 됐다.

하지만 탄생 1년 만에 김미화가 빠지고 빨리 얻은 인기만큼 사람들은 말장난의 식상함을 말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위기는 박준형·정종철 등이 등장한 ‘갈갈이 트리오’를 시작으로 한두 번째 전성기로 극복된다. 무에서 파인애플까지 가리지 않고 앞니로 갈아대는 몸개그와 성대모사로는 입신의 경지에 이른 정종철은 다양한 시도로 개그 콘서트의 장르를 확 넓혔다.

이들은 이 외에도 생활 사투리 같은 언어 개그로 또 다른 대박을 터뜨렸고, 우비 삼남매, 마빡이와 같은 파격적이고 전위적인 개그를 시도하기도 했다. 2002년부터 한 2년간 심현섭·강성범 등이 나갔던 또 다른 위기에는 안상태·유세윤·장동민·강유미·안영미 등 19기 개그맨들이 부상하며 빈 자리를 메웠다. 이들은 뒤이어 나간 박준형과 정종철의 시대를 대신해 요즘의 또 다른 전성기를 이끄는 주인공들이다.

주인공들의 세대교체야 어쩌면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정작 가장 큰 위기는 버라이어티 쇼라는 거대한 조류의 변화가 닥친 것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위기 앞에서 개콘은 이제 전통만이 품을 수 있는 저력을 드러내 보인다. 초창기 개콘이 반짝반짝하는 아이디어와 신선한 낯섦, 발랄함으로 승부하는 장기자랑 내지는 학예회 분위기였다면 점차 개콘은 오랜 세월 동안 다져진 기본기와 예리한 시선을 가진 유머의 오페라로 바뀌었다. 뚜렷한 유행어가 없어도, 기가 막힌 반전이 없어도 눈짓 하나, 다져진 몸놀림을 바탕으로 한 연기력만으로도 재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단발적인 재치보다는 세밀한 표현력과 반복을 통해 큰 웃음을 이끌어낸다.

그런 자신감이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안상태의 ‘깜박 홈쇼핑’, 유세윤과 강유미의 ‘사랑의 카운슬러’, 신봉선·장동민·김대희의 ‘대화가 필요해’, 김병만·류담의 ‘달인’ 등이 대표적인 코너다. 잘 세공된 연기의 ‘작품’을 감상하는 맛은 산만한 버라이어티 쇼가 절대 줄 수 없는 독특한 즐거움이다.

언어유희, 몸개그, 음악개그, 성대모사, 패러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늘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면서도 시대와 예리하게 공감하는 날카로움을 보여 준 것 역시 개콘의 생명력을 길게 한 원동력이다. 단순히 이마를 때려대는 ‘마빡이’, 뚱뚱한 여성을 손쉽게 희화화한 ‘출산드라’, 엄청나게 과장된 분장 쇼 ‘분장실의 강선생님’ 등이 인기를 얻었던 것은 단순히 캐릭터나 외모의 과장 때문만이 아니라 현실을 서늘하게 담아내는 시선, 혹은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담아내려는 시도가 보였기 때문이다.

조연출에서부터 시작해 300회 넘게 개콘을 이끌어오고 있는 김석현 PD는 “이제 어떤 아이디어가 담긴 어떤 코너가 되더라도 그 속에 다중적인 의미와 코드를 담아 시대와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개그콘서트는 “숙련공들이 미끈하게 뽑아낸 잘 포장된 상품”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시청자들 역시 이제 개콘이 어떤 시도를 하더라도 믿고 기다리면서 볼 만큼의 넉넉한 신뢰감을 보낼 준비가 돼 있다. 이 기분 좋은 ‘이심전심’이 앞으로 더 새로운 개콘의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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