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선 리더십, 공장·지방선 현장능력 ‘끝없는 검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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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호 10면

지난 3월에 열린 중국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2차 회의에 앞서 국가를 부르고 있다. 뒷줄 왼쪽부터 시진핑 국가부주석, 자칭린 정치협상회의 주석, 후진타오 주석, 원자바오 총리, 리창춘 정치국 상무위원, 리커창 부총리. 앞줄 가운데는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 중앙포토

“인기는 몰라도 능력은 뛰어나다.” 서방 인사들이 말하는 중국 지도부에 대한 평가다. 민선은 아니지만 능력은 한결같이 빼어나다는 얘기다. 중국 지도부는 어떻게 충원되는 것일까. 엘리트들의 대기처로 주목받는 곳은 ‘공산당 예비군’으로 불리는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이다. 후진타오 주석의 권력 기반이기도 하다. 7200만 명을 거느린 공청단의 제1인자 루하오(陸昊·42·사진)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통해 중국 최고위층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엿본다.

중국 차세대 엘리트 어떻게 키우나 루하오 공청단 제1서기의 경우

지난달 5일 베이징 첸먼(前門) 둥다(東大)가에 위치한 공청단 본부 회의실. 무협지 주인공처럼 뒤로 빗어 넘긴 머리에 시원한 이마가 돋보이는 루하오가 성큼 들어섰다. 승진할 때마다 ‘최연소’ 타이틀이 붙는 신세대 정치인답게 걸음걸이엔 자신감이 배어났다.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을 단장으로 한 한국국제문화교류원 일행에게 건네는 인사말 또한 단도직입적이고 거침이 없었다.

“밥 먹고 폭탄주 마시는 게 교류의 전부가 돼서는 안 된다. 과거의 중·한 우호가 미래의 우호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각 세대가 매번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
직설적이고 자칫 훈계처럼 들릴 수 있는 그의 발언은 1997년 출간돼 화제를 모은 책 『중국도 NO라고 말할 수 있다(中國也可以說不)』나 3월 출간된 『중국은 불쾌하다(中國不高興)』 등을 떠올리게 한다.

할아버지가 부총리 역임한 ‘태자당’
루하오는 중국 지도층이 배양하는 차세대 지도자들의 특질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다.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전문성을 갖추되 학문적인 이론 능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둘째, 창조적인 사고를 하고 창조적인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국제 분야에 대한 안목, 즉 국제적인 시야를 갖춰야 한다.

루하오가 걸어온 정치 역정을 살펴보는 건 바로 중국 지도부 인사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선발되는가를 가늠하기 위해서다. 그에게는 태자당(太子黨: 혁명 원로 및 고위층 후손)이란 수식어가 따른다. 조부 루딩이(陸定一: 1906~96년)가 당 선전부장, 국무원 문화부장, 부총리 등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태자당 출신이자 차세대 최고지도자인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처럼 집안 배경이 결정적 요인은 아니지만 플러스로 작용한다.

루하오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건 시안(西安)시 제85중학에 들어가면서다. 고교 1학년 때 반장을 맡아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다. 담임이던 구밍친(顧銘琴)은 ‘몸이 아플 때 루하오에게 반을 이끌게 하면 안심이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루하오가 무슨 일을 하자고 외치면 급우들이 모두 따르는 ‘일호백응(一呼百應)’의 기세가 있었다는 것이다.

큰 키는 아니었지만 학교 배구팀 주장으로 3년 내내 활약하기도 했다. 이 같은 탁월한 리더십 덕택에 루하오는 3학년인 18세 때 공산당에 가입해 문화혁명 이후 시안이 배출한 ‘최초의 고교생 당원’이 된다. 동시에 시안시의 유일한 고교생 공청단 위원으로 뽑힌다. 공산당원과 공청단 위원이 되면서 루하오는 정치 엘리트로의 첫발을 내딛는다.

고교 3학년 때 이과에서 문과로 바꾼 루하오는 우수학생 특별전형을 통해 베이징대 경제관리학원에 진학한다. 대학 과(科) 선택은 테크노크라트에서 문과 출신 중시로 바뀌고 있는 중국 지도부 내부의 변화를 반영한다. 스승은 리이닝(<53B2>以寧). 리이닝은 리커창 부총리의 은사다. 차세대 총리로 점쳐지는 리커창은 루하오보다 15년 앞선 93년에 공청단 제1서기가 된 인물이다.

대학에 들어온 루하오는 우선 학업에 매진한다. 고교 때 반에서 3등 안에 드는 실력이었지만 대학 동기 40명 중 16명이 산시(陝西)성에서 수석을 차지한 학생의 점수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뒀을 만큼 실력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성적이 안정되자 2학년 때는 베이징대 학생회 활동에 참여한다. 그해 베이징대에서 문혁 이후 직선으로 선출한 첫 번째 학생회 주석이 된다.

베이징 부시장으로 대중에 얼굴 알려
베이징대 학생회 상무대표위원회 회장으로 활약했던 리커창과 거의 흡사한 행보다. 또 루하오는 뛰어난 춤 솜씨로 ‘무림고수(舞林高手)’라는 애칭을 듣는데 이는 역시 베이징대 재학 시절 준수한 외모와 탁월한 댄스 실력으로 유명했던 후진타오 주석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학업을 통해 이론 수준을 갖추면 현장으로 보내 실력을 가늠해 보는 게 중국 지도자 선발의 필수 과정이다. 이론과 실제를 두루 평가하는 부분이다. 대학 졸업 후 루하오는 베이징 칭허(淸河) 면방직 공장에 배치된다. 매년 적자를 내는 직원 5000명의 국유기업이었다. 그는 밑바닥을 배우는 동시에 대학원에도 진학한다. 28세 때인 95년 루하오는 공장장이 된다. 최연소 공장장이 돼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루하오가 회사를 흑자로 돌려놓는 데는 3년이면 족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98년도 베이징시 10대 우수 청년’으로 선정된다. 현장 대처 능력을 보면서 업무 능력과 리더의 자질을 엿보는 검증 작업은 마치 70년대 말~80년대 초의 쑨다광(孫大光) 지질광산부 부장이 당시 간쑤(甘肅)성 지질역학원으로 일하던 원자바오 총리를 발탁할 때와 유사하다.

물론 검증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된다. 루하오는 이번엔 창조적 사고와 행동을 시험받기 위해 중국의 실리콘 밸리로 불리는 베이징의 중관춘(中關村) 과학기술원관리위원회 부주임으로 임명된다. 32세 때였다. 최연소 국장급 간부가 된 루하오는 여기서도 중관춘 내 최초의 외상(外商)·개인 합자기업 설립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 호평을 받는다.

두 차례 검증 작업을 무사히 통과한 루하오는 2002년 3월 지방인 창장(長江) 싼샤(三峽)총공사로 발령받는다. 이른바 ‘괘직단련(掛職鍛煉)’이다. 지방으로 내려가 너른 세상을 이해하고 민초들의 삶의 현장을 살피는 교육을 받는 것이다. 이 같은 괘직단련은 중국 지도자들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관문에 해당한다.

이어 35세인 2003년, 루하오는 베이징시 부시장이 돼 최연소 차관급 관료가 된다. 그가 맡게 된 분야는 공업과 안전생산, 국유자산 감독관리, 정보화 방면 등이었다. 때맞춰 중국에 진출한 한국의 현대자동자 관계자들과 긴밀하게 교류하는 등 외국인들과 만나며 국제적인 안목을 키운다. 중국 미디어에 모습을 드러내며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 시기였다.

41세가 되던 지난해 5월 루하오는 정치 역정에 또다시 ‘최연소’ 타이틀을 추가했다. 7200만 공청단의 1인자인 중앙서기처 제1서기에 오르며 최연소 ‘부장(장관)’이 된 것이다. 이 자리를 제대로 소화할 경우 지방 성(省) 정부 성장 발탁에 이어 당 중앙 심장부로의 진입이라는 출세 코스를 달릴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끊임없는 ‘검증 작업’이 기다리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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