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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미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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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대문의 『화랑세기』라는 책은 『삼국사기』 진흥왕 본기에 나온다. “어진 재상과 용맹스러운 장수가 모두 화랑에서 나왔다”는 내용이 인용돼 있다. 제목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지만 책은 언젠가 사라져 버린 뒤였다. 그러던 1989년, 일본 궁내성 도서관에 보관된 『화랑세기』 원문을 필사했다는 자료가 등장했다. 이 자료에는 540년부터 681년까지 살았던 32명의 풍월주(화랑의 수장)의 전기가 담겨 있었다. 그 뒤로 이 필사본이 위서냐 진짜 역사냐는 논란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필사본에 따르면 6세기 초 신라 조정은 여걸 미실의 독무대였다. 세 명의 풍월주를 남편과 연인으로 두었고 진흥-진지-진평 세 왕의 침실을 통해 조정을 장악했다. 남동생과 두 아들도 풍월주의 자리에 오른다. 한마디로 미실의 삶이 곧 화랑의 역사지만 다른 문헌에는 그 흔적이 보이질 않아 실존 인물 여부가 의심스럽다. 최근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는 MBC TV 드라마 ‘선덕여왕’은 이 책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선덕여왕을 보는 『삼국사기』와 미실을 보는 『화랑세기』의 차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선덕여왕은 쉽게 왕이 되지 못했다. 여자를 왕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귀족들은 치열하게 반발했다. 칠숙과 석품의 난이 진압되고서야 여왕의 등장이 가능해졌다. 집권 후에도 견제는 끊이지 않았다. 당 태종은 “인물이 없으면 내가 왕을 보내 주랴”라며 신라 사신을 희롱했고, 고구려와 백제도 적극 공세를 취했다. 말년에도 귀족인 비담과 염장이 난을 일으켰다. 저자 김부식은 “여자를 왕으로 삼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덧붙였을 정도다.

반면 『화랑세기』의 미실은 미모와 기품은 물론 탁월한 위엄과 정략을 통해 적들까지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통치력을 뽐냈다. 화랑들에게 미실이 미친 영향을 기술하는 저자의 붓끝에선 존경심이 느껴진다. 이 책에 따르면 선덕여왕 역시 네 명의 남편을 갈아치우며 스스로 왕위를 개척한 여장부다.

이런 시각 차이는 신라인 김대문과 고려인 김부식의 차이일까, 아니면 『화랑세기』가 20세기의 눈으로 만들어진 위서라는 증거일까. 사서의 진위 여부는 학계에서 판가름할 일이지만 사실이 아닌 창작이라면 오히려 더 대단하게 느껴질 만치 『화랑세기』의 구성은 치밀하고 웅장하다. 과연 미실은 진짜 존재했을까.

송원섭 JES 엔터테인먼트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