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사태=진세근 특파원 5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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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인도네시아에서 학생과 시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폭력적 물결' 은 퇴조 단계다. 지금은 야당지도자나 반정부 재야인사들이 주도하는 비폭력 정권퇴진운동이 거세게 밀려들고 있다. "

연휴기간중 소강상태를 보였던 인도네시아 시위가 12일 자카르타 시내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실탄사격을 가해 6명이 숨지는 등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거리의 시민들은 이날 보안군의 발포를 "수하르토 대통령의 부재를 틈타 사전에 계획된 강경 진압의 수순이 시작된 것 아니냐" 며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고 유혈사태에 몸서리쳤다.

트리삭티대 총격 현장에서 만난 한 대학생은 "수하르토가 자신의 책임을 피하는 한 방법으로 G15회담 참석중 군부를 통해 시위를 강경 진압한 뒤 귀국후 사태를 수습하는 절차를 밟을 가능성이 있다" 고 풀이하기도 했다.

물가폭등으로 촉발된 시위 이후 자카르타에서 보안군이 시위진압에 실탄을 사용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또 지방에서 5일 이후 4명이 숨진 것과 비교할 때 자카르타에서 하룻새 6명이 숨진 것은 시위의 규모나 강도가 커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현지 언론의 한 관계자도 "이날 시위는 지금까지 벌어진 시위중 가장 격렬했다" 고 말했다.

이틀간의 연휴가 끝난 이날 자카르타.반둥.메단 등 주요 도시에서는 학생들이 학교별로 수하르토 성토대회를 가졌고 시민들도 이에 가세했다.

반둥기술대에서는 학생 1천명이 '수하르토 통치 32년 종식' 을 외치며 방패와 전기봉으로 무장한 경찰 80여명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자카르타 동부 쿠팡지역에서는 '민주주의 회복' 을 외치는 학생.시민들에게 최루가스와 고무탄을 발포해 수십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메단시 기독교계열 대학인 로멘손대학의 영문과 교수 하로요토 에디 (57) 는 "한마디로 지하수처럼 흐르던 국민들의 불만이 지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고 정국을 진단했다.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특히 이슬람권의 움직임이 주목받고 있다.

2천5백만 이슬람 교도로 구성된 온건단체 무하마디야의 아미엔 라이스 (53) 의장이 12일 자카르타 남부 족자카르타에서 주도한 집회에는 1만여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교수.의사.엔지니어.교사 등 이른바 여론주도층 인사들이다.

반 (反) 수하르토 운동이 학생.서민층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족자카르타시 가드자 마다대학의 이히라술 아말 (56) 총장 같은 인사는 "지금 같은 총체적 위기상황에서 학생들이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 라며 아예 대놓고 학생시위를 지지하고 나섰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최근 "책임있는 인사들의 무분별한 발언과 선동은 정국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고 경고하고 나선 것도 이들이 가진 파괴력을 충분히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당 지도자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의 대변인 수라기남 (41) 은 12일 중앙일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지난 2월 대통령 선거 당시 자카르타호텔 연회장에서 열린 '아미엔 라이스 대통령후보 후원회의 밤' 행사에 '인도네시아 이슬람 지식인연합 (ICMI)' 회원 2백여명이 참가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ICMI는 지난 90년 하비비 현 부통령이 친 (親) 수하르토 세력으로 구축한 일종의 회교 전위대다.

이들중 상당수가 졸지에 야권세력으로 돌아선 것이다.

수라기남은 "이는 현 정부의 정국 장악력이 얼마나 쇠퇴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라고 주장했다.

또다른 이슬람 조직인 나드라툴 울라마의 아부두라함 와히드 의장도 최근 "아미엔 라이스는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 이라며 전폭적 지지를 선언했다.

인도네시아 정국은 군부에 둘러싸인 노회한 수하르토 정권과 시민들의 불만.개혁욕구를 흡수해 거대 세력으로 자라고 있는 민주세력간의 양자 대결로 치닫고 있다.

자카르타 = 진세근 특파원

〈sk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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