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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부흥시킨 표트르 대제…농민층 뺀 ‘그들만의 개혁’ 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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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1697년 러시아는 250명의 젊은 귀족으로 구성된 ‘대사절단’을 서유럽 각국에 파견해 유럽 과학을 습득하도록 했다. 사절단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만큼이나 키가 큰 청년이 눈길을 끌었다. 2m에 달하는 거구의 표트르 황제가 신분을 숨긴 채 사절단의 일원으로 동행한 것이다. 1672년 6월 9일에 태어난 표트르는 당시 25세 청년이었다. 그는 18개월 동안의 순방 기간에 정치·외교 기법 외에도, 목수·선원·병기공·대장장이·치과의사 등 14가지나 되는 다양한 기술을 익혔다. 특히 4개월 이상 머물렀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는 선박 건조 기술을 익히는 데 전념했다.

1698년 러시아 귀족들은 막 유럽에서 돌아온 표트르를 알현하기 위해 속속 궁에 모였다. 이때 서양식 옷을 입은 표트르는 큼직한 가위를 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귀족 중 신분이 가장 높은 자들부터 수염을 싹둑 잘라버렸다(그림). 당시 러시아인에게 긴 수염은 자부심을 상징했고, 러시아정교에서는 수염 깎는 행위를 이단시했다. 그러나 표트르는 서유럽을 여행하면서 러시아인의 긴 겉옷과 길게 기른 수염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이는지를 깨달았다. 사흘이 지나자 궁정에서 수염을 기른 사람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고종이 단발령(斷髮令·1895년)을 내리기 2세기 전의 일이었다.

표트르는 모든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수염을 깎도록 명령했고, 수염을 기르는 자에게는 귀족 60루블, 평민 30루블이라는 무거운 ‘수염세’를 부과했다. 세계 어디에도 이런 괴상한 세금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 세금으로 해군 함대를 편성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다음은 옷이었다. 몇 달 후 표트르는 가위를 들고 시종들의 기다란 소맷자락을 잘라냈다. ‘소맷자락이 수프에 빠지는 등 온갖 말썽을 일으킨다’는 이유에서였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개혁 덕분에 러시아는 유럽의 대국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폐해도 컸다. 표트르가 흥미를 보인 것은 유럽의 기술뿐이었다. 그는 유럽의 의회정치에는 무관심했고, 전제정치를 강화시키면서 농민의 이익을 무시했다. 징병과 세금으로 그들을 파멸시켰고, 결핍과 무지에 빠져들도록 방치했다. 개혁으로 이익을 얻은 것은 상층계급뿐이었고, 그들은 농민과 더 이상 공통점이 없었다. ‘두 국민’ 사이에는 심각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의 원인 중 하나는 분명 이 ‘균열’이었다. 소통 거부와 일방주의의 쓴 열매를 피해가는 정치적 지혜는 오늘도 필요하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