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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한나라당 기득권 세력들의 기묘한 공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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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4·29 재·보선 참패 뒤 한나라당에서 당·정·청 전면 쇄신을 처음 요구한 집단은 초선 의원 14명의 모임인 ‘민본 21’이다. 민본 21의 쇄신 요구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정국을 거친 뒤 지도부 사퇴, 조기 전당대회로 번지고 있다.

민본 21의 대표인 김성식 의원은 “지금 쇄신하지 않으면 10월 재·보선에서 또 패배할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숱하게 반복하던 시행착오를 똑같이 겪을 수야 없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초선, 특히 수도권 의원들이 지역구에서 느끼는 ‘지지층 이탈 현상’은 공포스러울 정도라고 한다. 초선들의 쇄신 요구는 그만큼 절박해 보인다.

쇄신의 포인트는 박희태 대표의 거취다. 박 대표는 말하자면 이명박·박근혜 양대 세력의 교착 지점에 서 있다. 쇄신은 교착 상태를 깨는 데서 출발해야 하는데 박 대표는 계속 그 자리에 있을 모양이다. 한나라당의 많은 사람이 입만 열면 쇄신, 쇄신 하지만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 박희태 체제의 완고함 때문이다.

70대의 박 대표는 사실 순리와 흐름을 따르는 성격이다. 당 대표 자리에 무슨 꿀단지가 있다는 듯 연연해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자리에 연연해하는 것처럼 비치는 건 한나라당 기득권 세력들의 기묘한 동거 때문이다. 한나라당 양대 기득권 세력인 이명박계와 박근혜계 모두 박 대표를 필요로 하고 있다. 박 대표는 4·29 재·보선 뒤 청와대에 들어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면목 없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 대통령은 이처럼 깍듯하게 자신을 섬기고, 자신의 뜻을 당에 충실하게 반영하는 박 대표가 더 없이 편할 것이다. 무엇보다 통치자에 대한 불만의 화살을 당 대표가 ‘면목 없다’며 대신 맞아 주는 게 마음에 들었을지 모른다. 책임의 확산을 차단하는 역할이다.

박근혜 전 대표는 대권욕 없는 박희태 대표가 자기의 라이벌이 아니며, 무리하게 몰아붙이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에서 편안한 상대일 것이다. 박 대표가 이 대통령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이 대통령의 직계인 이재오 전 의원이 대표를 맡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박 전 대표는 이 전 의원을 “오만의 극치”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박 대표는 최선은 아니지만 최악도 아니다.

결국 박희태 대표는 이 대통령에겐 ‘차단의 장치’, 박 전 대표에겐 ‘차악의 존재’로 기능하는 셈이다. 이게 한나라당의 적대적인 두 기득권 세력이 박 대표 카드로 기묘하게 공생하고 있는 구조다. 적대적인 공생 구조다.

이런 구조에서 희생되는 건 집권세력의 투명성·능동성·책임성이다. 자리와 실력이 일치하지 않으니 투명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해도 정파적으로 해석되니 능동성이 떨어지고, 은밀히 지시는 하되 책임은 지지 않는 풍조가 난만하다. 기묘한 동거체제 위에 성립된 교착 상태는 조직의 자율성을 파괴하고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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