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얻은 전화번호, 그 전 주인은 살해당한 창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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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호 13면

스티븐 킹, 마이클 크라이튼 등 국내에도 친숙한 대형 작가들만큼은 아니지만 사건기자 출신인 장르 소설가 마이클 코넬리(53.사진)의 미국 내 입지는 상당하다. 과묵하면서도 집요한 LA 경찰국 소속 형사 해리 보시가 장기 미제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 ‘해리 보시 시리즈’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좋아했을 정도다. 1994년 워싱턴의 한 서점에서 클린턴이 시리즈 중 한 권을 사 들고 나오는 장면이 TV 카메라를 통해 미국 전역에 중계되면서 그는 일약 유명 인사가 됐다.

그의 장기는 역시 범죄 스릴러다. 플로리다의 한 지방지에서 일하다 능력을 인정받아 LA 타임스로 직장을 옮겨 범죄 담당 기자로 활동한 그는 경찰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며 ‘화끈한’ 소설 소재들을 제공받곤 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다년간에 걸친 그의 취재 노하우가 가미됐을 것이다. 자연히 범죄 현장과 성격 묘사, 경찰 수사 양상의 디테일에 관한 한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에는 그의 작품 중 『시인』『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등이 이미 소개돼 있다. 같은 출판사가 출간한 신간의 원제는 ‘10센트 쫓기’쯤을 뜻하는 『Chasing the dime』. 물질의 최소 단위인 분자로 만들어진 칩을 개발해 10센트 동전만 한 크기의 ‘분자 컴퓨터’를 만들려는 화학자 주인공 헨리 피어스를 설명하는 제목이다.

소설은 첫 장부터 눈을 떼기 어렵다. 약혼녀와 결별한 피어스는 LA 샌타모니카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월세 3000달러짜리 12층 아파트를 얻어 막 짐을 부린 참이다. 한데 ‘릴리’라는 여성을 찾는 남자들의 전화가 잇따라 걸려 온다. BMW를 몰고 다니고 수천만 달러 규모의 투자 설명회를 코앞에 둔 피어스가 집 전화번호를 바꿨더라면 나중에 살인 피의자로 몰리고 갱들에게 린치당하는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호기심. 피어스는 진실을 찾아 나선다.

피어스는 곧 릴리가 인터넷을 통해 매춘 영업을 하는 ‘에스코트’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배후에는 당연히 매춘 조직과 포주 등이 버티고 있다. 이쯤에서 발을 뺄 법하지만 피어스는 전진한다. 창녀였던 친누나가 살해된 개인적 아픔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피어스의 탐정 행세는 호기심 차원이 아니라 스스로의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을 치유하는 과정이 된다.

피어스가 기지와 순발력을 발휘해 영원히 묻힐 뻔한 릴리의 살인 사건을 경찰이 수사토록 하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특히 그를 의심하는 경찰관 레너와의 심리전이 압권이다. ‘경찰서 피의자 신문조서’에 익숙지 않고서는 쓰지 못했을 대목이다.

물론 ‘옥에 티’도 있다. 개인적인 동기에도 불구하고 피어스의 ‘창녀 돕기’는 맹목적으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소설은 휴일 한나절 보내기용으로는 맞춤할 듯싶다. 톱니바퀴처럼 에피소드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계속해 책장을 넘기게 되는 ‘페이지 터너(page turner)’다. 무엇보다 범인은 역시 의외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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