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17>이호철의 문협회장 도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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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호 13면

1975년 1월 한국문인협회 총회에 참석한 소설가 이호철씨

1975년에 접어들면서 문인들의 관심은 1월 하순께 열리는 한국문인협회 정기총회에 쏠리고 있었다. 73년 이사장 선거에서 조연현에게 분패한 김동리가 다시 출마, 두 사람 간의 두 번째 ‘대회전’이 벌어지지 않겠느냐에 대한 관심이었다. 대다수의 문인은 김동리의 출마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패배 직후 ‘한국문학’을 창간한 것도 그 준비 작업의 일환이며, 측근 문인들에게 재도전 의사를 분명히 밝혀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변수가 될 만한 일이 발생했다. ‘김동리 외 53인’의 명의로 만들어진 ‘괴문서’가 유권자인 대다수 문인에게 발송된 것이다. 조연현 이사장과 그 측근 문인들을 비방하는 내용의 이 문서는 문단에 적잖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내용 중 일부가 사실일지라도 이것은 선거의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배되지 않냐는 것이 많은 문인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 문건은 박종우 등 김동리의 이사장 재직 시절부터 그를 보필해 온 몇몇 측근 문인이 김동리의 동의 없이 자의로 만들어 배포한 것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김동리는 ‘괴문서’ 작성을 주도한 측근 문인들을 불러 크게 꾸짖고 당장 이사장 선거 출마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같은 사실은 이문구를 통해 새로 발족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핵심 멤버들에게도 전해졌다. 본래 이들은 제도권 문단의 동향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자실’ 발족 이후에는 더 많은 문인의 호응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협 이사장 선거에 직접 뛰어드는 방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이사장 후보로 몇몇 문인이 거론되다가 이호철로 낙착됐다. 이호철과 같은 40대의 고은이 선거사무장 역할을 자청해 맡기로 했고, 30대의 이문구·박태순·황석영 등이 실무 일을 거들기로 했으며 아직 20대 신인인 송기원·이시영 등이 ‘행동대원’으로 나서기로 했다.

그 무렵 ‘자실’의 회원 수는 100명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게다가 김동리의 지지 세력을 그대로 흡수하고 젊은 층의 호응을 얻어낸다면 승산이 있다고 본 ‘자실’ 측의 계산도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괴문서’ 투입 사건으로 김동리 지지 세력의 상당수가 이탈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새로 문협 회원이 되는 젊은 층의 문인들이 기관지 ‘월간문학’ 때문에 기존 체제에 쉽사리 등을 돌리지 못하는 상황을 감안하지 못한 계산이었다.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자유당 시절의 정치판을 빼닮은 온갖 잡음이 꼬리를 물었다. 지방 문인들에게 일제히 5000원짜리 송금 수표가 배달됐다는 이야기, 총회를 며칠 앞두고 상경한 지방 문인들을 1급호텔에 투숙시키고 향응을 베풀었다는 이야기, 몇몇 문학지는 게재를 약속하고 받아들인 원고가 산더미처럼 쌓여 그 원고로만 책을 만들어도 여러 해 걸릴 것이라는 이야기…. 반면 이호철 후보 측은 전화로 혹은 개별 접촉으로 지지를 부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차피 프로와 아마추어의 대결 양상이었으나 이호철에게 호재로 작용할 만한 변수가 생길 뻔한 일은 있었다. 부이사장 출마를 준비하던 문덕수가 김동리의 출마 포기에 고무돼 이사장 출마 쪽으로 방향을 바꿀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문단의 이른바 ‘중간 보스’ 가운데서 지지층이 가장 두터웠던 문덕수는 73년 총회에서 조연현의 당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 사례로 선거 후 조연현이 주도하던 월간 시 전문지 ‘시문학’을 물려받은 문덕수는 문협 내에서 조연현에 버금하는 막강한 파워를 구축해 가고 있었다.

조연현·이호철·문덕수의 3자 출마 구도가 되면 조연현에게는 악재로, 이호철에게는 호재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크게 당황한 조연현 캠프는 성향이 비슷한 문덕수계 문인들을 개별 접촉해 지지를 철회하도록 종용했다. 문덕수 캠프는 계파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이호철과의 제휴를 시도했으나 어느 한쪽의 사퇴를 전제로 하는 제휴는 성사될 수 없었다.

조연현과 문덕수 간의 타협은 총회 하루 전날 극적으로 이뤄졌다. 문덕수는 조연현 측으로부터 차기 이사장을 다짐받고 부이사장 출마로 마음을 돌렸다. 선거는 조연현의 압도적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호철은 조연현 득표 수의 절반을 약간 상회했다. 문덕수는 3명을 뽑는 부이사장 선거에서 50% 가까운 득표로 1위 당선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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