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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스포츠] 얏! 얏! 죽도 부딪치며 절제의 정신 배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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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승효상 대표가 직원들과 함께 검도 수련을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서 낙산 쪽으로 살짝 들어간 곳에 이로재(履露齎)가 있다. 건축가 승효상(57)씨가 30여 명의 직원과 함께 일하는 곳이다. 이로재는 ‘이슬을 밟고 찾아오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 곳은 마룻바닥을 밟을 때 나는 힘찬 발디딤 소리로 아침을 연다. 승 대표는 2003년 이로재 건물을 지으면서 지하를 마루가 깔린 검도장으로 꾸몄기 때문이다. 오전 7시부터 승 대표와 직원들이 이곳에서 검도 수련을 한다. 힘찬 기합 소리와 죽도가 맞부닥치는 소리가 건물 바깥까지 새어나온다. 1시간 30분의 수련이 끝나면 도복은 온통 땀으로 젖고 몸에서는 훈김이 올라온다. 호면(얼굴보호대)을 벗고 조용히 꿇어앉아 호흡을 가다듬은 뒤 서로에게 큰절로 예를 갖춘다. 샤워를 마치면 따뜻한 토스트와 커피가 기다리고 있다. 이로재 사람들은 이렇게 하루를 시작한다.

승 대표가 본격적으로 검도를 한 것은 2003년부터다. 불규칙한 생활로 몸 이곳저곳에 이상 신호가 오더니 급기야 목 디스크 증세까지 생겼다. ‘이래선 안 되겠다. 운동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 시절 잠시 수련했던 검도를 찾았다. 놀랍게도 검도를 다시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디스크 증세가 사라졌다고 한다.

“우리나라 건축가들은 단명 하는 경우가 많아요. 밥 먹듯 밤샘 작업을 하고, 스트레스 심하고, 그래서 폭음을 하죠.” 그를 수제자로 끔찍히 아꼈던 김수근 선생도 55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래서 승 대표는 직원들에게 반강제로 검도를 시켰다. 일부 반발도 있었지만 “너희 건강하게 오래 살라고 하는 건데 고마운 줄 알라”고 눌렀다. 직원들도 차츰 검도의 효능과 위력을 체험하자 자발적으로 수련에 참가했다. 지금은 승 대표를 포함해 5명이 공인 2단이다. 그는 “검도 수련에 열심히 나오는 직원이 더 예뻐보이고 역시 일도 잘하더라”며 껄껄 웃었다.

승 대표는 검도의 정신을 ‘절제’라고 규정했다. 섬광 같은 타격을 위해 힘을 비축하며, 속임수나 군더더기 없이 본질을 향해 치고들어가는 것이다. 이 정신은 승 대표의 건축 철학인 ‘빈자(貧者)의 미학’에도 스며들어 있다. “나는 불필요한 장식이나 거추장스러운 설명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작품에서도 콘크리트·나무 같은 재료를 그대로 노출하죠. 그러려면 늘 자신 있고 정직해야 합니다.”

검도는 이로재를 건축계에 우뚝 세운 힘이기도 했다. 이곳 사람들을 5년째 지도하고 있는 서병윤 범사(공인 8단)는 “쳐서 이기려 하지 말고 이긴 다음에 쳐라”고 늘 강조한다.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든 다음에 공격하라는 뜻이다. 이는 이로재가 중국·말레이시아 등 해외에서 대형 설계 프로젝트를 따낸 비결이기도 하다는 게 승 대표의 설명이다. 무작정 달려들지 않고 충분히 연구하고 준비한 다음 입찰에 참가했고, 매번 승리했다는 것이다.

승 대표는 검도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조언을 했다. “처음 2개월이 매우 지루하고 힘듭니다. 견뎌내세요. 그러면 비로소 검도의 깊고 매력적인 세계에 발을 딛게 됩니다.”

정영재 기자

◆이로재=승효상 대표가 1989년 설립한 건축사 사무소. 서울 장충동 웰콤시티와 학동 수졸당 등의 작품으로 대한민국예술문화상 등 각종 건축상을 받았다. 2007년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 남쪽의 첸먼(前門)지역 30만㎡를 재개발하는 설계 프로젝트를 따내는 등 국제적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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