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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그 마음의 울타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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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 분명 사랑은 키우는 힘이 있다. 그 끝이 어찌 되든 사랑을 통해 사람은 키워지고 자란다. 사람이 성장을 멈추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을 그칠 때다. 평생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큰다. 남녀간의 사랑이 이러할진대 나라와 국민 사이의 사랑이라고 다를쏘냐. 나라와 국민이 서로 사랑하면 나라는 국민에게 더 나은 자랑스러운 국가의 모습으로 나타나길 바라고, 국민은 나라를 위해 더 나은 국민이 되길 소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정작 우리 나라와 국민은 사랑을 멈춘 것 같다.

# 무엇보다도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기준도 기강도 원칙도 방향도 없다. 온통 혼동과 혼란뿐이다. 뭣 하나 제대로 되는 일도, 제대로 가는 일도 없다. 고(故)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건만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 안 되고 납득 안 되는 일들 투성이다. 도대체 이런 나라에 발붙이고 사는 국민이 용하다 싶을 정도다.

# 마찬가지로 국민은 이 나라를 위해 더 나은 국민이 되길 애써 바라지도 않는 것 같다. 굳이 이런 나라에 목숨 바쳐 충성할 일이 있는가 하고 고민하는 국민들이 늘고 있다. 사랑이 상대방에 대한 가치를 발견해가는 일이듯이 국민이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나라를 함께 지키고 키워갈 가치를 발견하고 확인하며 북돋는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 국민은 그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기는커녕 가지고 있던 것마저 망실하는 처지에 있다. 아니 그렇게 내몰리고 있다.

# 대한민국의 가치란 무엇인가.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추상명사로는 설명이 안 된다. 대한민국의 가치는 ‘국민이 대한민국이란 마음의 울타리 안에서 살고 싶게 만드는 힘’이다. 그것이 분명하게 살아있으면 국민은 나라를 사랑하게 마련이고, 더 나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려고 몸부림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그런 가운데 대한민국은 국민이 그 울타리 안에서 더욱 살고 싶은 나라가 되어가는 것이다.

# 현충일은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왔다. 현충일은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 바친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영혼을 위무하는 날이다. 나라가 국민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새삼 언약하고 요구하는 날이 결코 아니다. 결국 이날은 나라와 국민이 서로 사랑함을 확인하는 날이다. 나라는 국민에게 스스로가 지켜져야 할 가치가 있음을 재차 확인시키고 국민은 이 나라를 수호하고 사랑해야 할 이유와 가치를 재확인하는 날이 현충일이다.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대한민국이란 울타리 안에서 살겠다고 몸부림치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 흘리고 죽어가야 했는지 그 까닭과 가치를 새삼 확인하고 다시 마음에 새기는 날이 현충일인 것이다.

# 지금 대한민국이란 마음의 울타리가 흔들리고 있다. 그 울타리 안에서 살고 싶다는 국민들의 분명한 의지와 가치가 희석되고 있다. 단순히 정권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나라와 국민 사이에 금이 간 것이다. 자기 삶의 울타리가 되어주기는커녕 되레 고단한 삶마저 떠나도록 압박하는 이런 나라에서 왜 더 살아야 하는가라는 회의와 물음 앞에 그냥 내던져지는 국민들이 너무 많아졌다. 그렇게 내던져진 국민들을 더 이상 방치하면 남녀가 파경에 이르듯 나라와 국민도 결국 깨지고 만다. 사랑에도 때가 있는 법! 정말이지 비상한 사랑의 묘약이 필요한 나라와 국민이다.

정진홍 논설위원